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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진 — Oth,
헤맨 만큼 모두 나의 땅이 된다는 말처럼, 삶은 어쩌면 나만의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순간과 눈을 맞추는 반려동물 도현과 버들이 곁에서 예진은 떨어진 꽃잎 하나, 바람에 흔들린 잎새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인다. 머나먼 풍경을 동경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허리 숙여 발치에 놓인 장면 가까이에 손을 뻗는다. 손끝에 스치는 생생한 사랑을 따라 걸음을 이어간다.
제주에서 3주간 머무르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면서요. 어떤 계기로 떠나게 된 건가요?
제주 ‘Salt’에서 진행하는 창작자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받았어요. 덕분에 상상으로만 그렸던 제주에서의 삶을 현실로 누릴 수 있었고요. 특별히 아는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서, 이곳에 머물면서 몇 년 동안 품고 있던 원고를 세상 밖으로 꺼내야겠다 싶었죠. 예상과 달리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도민들만 아는 장소나 제주의 자연을 마음껏 누비며 알찬 3주를 보냈어요. 계획했던 작업은 끝내지 못했지만, 선물 같은 시간을 원 없이 누렸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유람하며 마주한 기억을 마음속 방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예진 씨는 이번 제주의 시간을 어떤 모양으로 남겨둘 것 같아요?
그야말로, ‘사람 여행’이었어요. 제주의 자연 풍경도 아주 경이로웠지만, 그곳에서 연을 맺은 또래 친구들과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사업을 시작한 뒤로 또래 친구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주에 머무는 동안 “오늘 뭐 먹지?”, “어디 갈까?” 같은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고, 잘 놀았다며 그날을 마무리했죠. 학생 때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본 순수한 기쁨이었어요. 스트레스 없이 진심으로 즐겁게 지냈어요.
‘한 달에 한 번, 하나의 공간에 머물기’ 프로젝트를 6년째 이어오고 있어요. 지금처럼 여행지를 산책하듯 둘러보게 된 데에는 어떤 전환점이 있었나요?
돌아보면, 늘 여행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기보다는 내가 머무는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는 걸 더 선호했어요. 계절마다 영월을 찾아가는데, 숙소 울타리 밖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어요. 스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핀란드에서도 숲속 한가운데 있는 낡은 통나무집에서만 지냈어요. 여행을 다닌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언제 이런 곳을 또 오겠어?’라며 일정을 빡빡하게 짜고 주어진 계획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그러고 나면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감각이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오히려 느긋하게 머물러야 여행의 잔향이 훨씬 더 오래갔죠. 그래서 이제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고 믿으며 욕심을 덜어내요.
그렇다면 하루하루를 여행처럼 바라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오랫동안 10일의 휴가를 위해 1년을 버티는 삶을 살다 보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하는 날마다 현실에 또다시 발목을 내어주는 것만 같아 괴로웠죠. 그때부터 도피하듯 떠나는 대신, 평범한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보기로 다짐했어요. 이런 변화에는 반려동물 도현이의 영향도 컸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산책하며 삶의 태도를 조금씩 수정한 거죠. 처음엔 의무적인 일과였다면, 어느 순간부터 회복하는 시간과 다름없어졌어요. 이제는 산책 내내 이름 모를 작은 꽃을 살피고, 그림 같은 일몰을 바라보고, 산뜻한 바람에 실려 오는 풀 냄새를 맡느라 무척 바빠요. 도현이 덕분에 세상이 내어준 아름다움을 원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떠한 비용 없이도요.
산책을 통해 감탄하는 감각을 녹슬지 않게끔 유지하고 있네요.
맞아요. 가끔 집을 나설 때마다 바다 위의 선장이 되는 상상을 하기도 해요. 도현이랑 버들이는 어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배고, 길 위에서 만난 야생화들은 저와 함께 항해하길 기다리는 예비 선원들인 거죠.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익숙한 길도 새롭게 느껴져요.
셔터를 신중하게 누르던 시간을 지나 요즘은 꽃과 나뭇잎을 손에 쥐어 기록을 남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죠. 작업이 확장되며, 브랜드의 방향 또한 조금 달라졌을 것 같아요.
저에게 ‘Oth,’는 또 다른 정체성과도 같아요. 팬데믹 당시 갈증을 해소하고자, 여행을 테마로 한 이야기를 풀어냈죠. 그런데 하늘길이 다시 열리고, 모두가 어디론가 떠나기 시작하며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글과 사진, 영상으로만 기록을 남기던 방식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게 압화예요. 자연의 힘을 빌린 작업을 하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경험 기반의 제품과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브랜드의 서사도 함께 확장하게 되었죠. 덕분에 ‘다정한 이야기꾼’이라는 브랜드의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된 것 같아요.
“꽃을 만지는 일이 마치 손으로 춤추는 일 같았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손으로 물성을 감각하는 일에 특별히 애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촉감은 ‘내 의지로 선택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기에 더 특별하죠. 반려동물을 쓰다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을 때 전해지는 체온을 통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이슬 맺힌 새순을 매만지며 봄이 온 걸 눈치채기도 하고요. 그런 작은 접촉들이 쌓일수록 하루하루가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내가 이 순간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해요.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압화 작업만의 매력이 있다면요?
가장 큰 장점은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집 앞에서 주운 낙엽이나 꽃잎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거든요. 잎 하나하나 자연만의 고유한 색감과 형태가 있어요. 그런 미묘한 차이를 손끝으로 느끼는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남기는 것처럼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도 매력적이죠. 실패도 많이 해봤지만, 끝끝내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얻으면 얼마나 짜릿한지 몰라요. 그게 이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압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식물과의 만남이 있다면요?
붉은 장미와 카네이션 그리고 안개꽃이요. 너무 흔하게 보아온 꽃이라, 오히려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더라고요. 촌스럽다는 편견 때문에 더더욱 용기가 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압화를 해보니, 홀로 있을 때 비로소 빛이 나는 식물이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너무 쉽게 판단했구나 싶었어요. 요즘은 대중적인 꽃들에게서 새로운 얼굴을 찾아보려 해요. 평범한 재료에서 낯선 감각을 끌어내는 일이야말로 결국 전문가의 몫이기도 하니까요.
예진 씨는 산책할 때 어떤 방식으로 걷는 걸 좋아하나요?
때로는 지도에 의존하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향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은 익숙한 길을 걷다가도, 처음 보는 길이 나타나면 주저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봐요. 무조건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돌진하기보단, 마음껏 길을 잃어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산책을 “지도를 만들어가는 일”이라 표현한 것이 떠오르네요. 그렇다면 예진 씨 지도에는 어떤 길들이 수놓아져 있을까요?
초등학생 때 피시방에서 ‘디아블로’라는 게임을 처음 접했어요. 그 게임 속 지도는 직접 가본 곳만 나타나고, 나머지는 전부 어둠으로 덮여 있었어요.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만 제 발자취를 따라 지도 속 길이 열리는데, 그 이미지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경험의 폭이 넓어지는 걸 지도에 빗대어 말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제 지도엔 잘못된 길이든, 우연히 지나친 길이든, 검열 없이 모두 남겨두고 싶어요. 그게 저라는 사람의 여정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방식 같거든요.
“하루 중 산책은 시공간의 모든 족쇄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색에 잠기기에 좋은 때”라고 하셨죠. 홀로 산책에 나설 때면 마음 속엔 어떤 이야기가 흘러요?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음악을 들으며 익숙한 거리를 한 바퀴 돌아요.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눈 날에는, 혹시 실언은 없었나 곱씹어 보고요. 걷다 마음에 드는 잎을 만나면 ‘오늘은 너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지기도 해요. 머릿속이 복잡할 땐 가지치기하듯 불필요한 생각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싹이 돋기를 기다려요.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달리며 숨을 고르다 보면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기운을 차리는 순간이 올테니까요.
예전에는 취향과 기억을 나누고자 기록했다면, 이제는 “존귀한 생명의 번영을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사명감으로 창작을 이어가고 있어요. 이러한 책임감을 안겨준 결정적인 장면이 있나요?
춘천 소양호에는 크고 작은 섬이 여럿 있어요. 그중 하나는 제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어요. 외부 손길이 닿지 않은 동식물들의 터전이었거든요.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죠. 그런데 2년 전, 긴 장마로 지형이 무너져 초원이 호수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어요. 단 한순간에 사라지는 걸 보면서, 자연이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덧없었는지 실감했어요. 정말이지,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배려와 양보, 책임을 다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겠죠.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잖아요. 그래서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목소리를 내보려고 해요.
그 목소리가 더 멀리 가닿을 수 있도록 저도 계속 귀 기울일게요. 제주에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걷고 싶은 길이 있다면요?
도현이와 버들이 덕분에 매주 집 근처 인왕산에 올라요. 혼자였다면 감히 나서지 못했을 길인데, 두 아이와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거뜬히 오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과 오붓하게 서울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초소책방까지 이어진 길을 마음껏 걷고 싶어요. 숲의 품에 안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제 곁에 누운 도현이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다가 산책길에 수집한 잎으로 압화 작업을 해도 좋겠네요.
나와 다른 존재와 함께 걸으며 사랑과 행복을 배워가고 있네요.
아이들이 없는 삶은 이제는 상상하기도 어려워요. 언제 어디서든 아이들과 함께한 산책을 떠올릴 수 있거든요. 발맞춰 걸으며 제 세상도 많이 확장되었고요. 지금 제 삶은 그런 평범한 장면들과, 거기 깃든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게 저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힘이에요.
에디터 오은재
사진 문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