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과 시간으로 비로소 완성된

김민정 — 빅슬립

오랜 세월을 지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이 발견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물건. 그 한순간의 우연이 우리가 빈티지 제품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가 아닐까. 도로변 좁은 계단을 통과해 ‘빅슬립’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형형색색 조명이 자아내는 빛 덕분에 해가 환한 낮인데도 꿈꾸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 든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취향이 켜켜이 쌓인 가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우연이 만들어낸 순간을 선물처럼 마주할 수 있다.

빅슬립에 오면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이 많은 물건은 언제부터 모으기 시작했어요?

언제부터라고 딱 말하긴 어렵지만, 어릴 때부터 물건 모으는 걸 좋아했어요. 가족들과 살 때 여동생이랑 같은 방을 썼는데, 책상 서랍도 나눠 썼거든요. 그때 제가 좋아하는 연필이나 지우개, 연필깎이 같은 걸 서랍에 넣어두고 열어서 보는 걸 즐기던 기억이 나요. 방을 나눠 쓰다 보니 이쪽은 내 공간, 저쪽은 동생 공간이었는데 그 작은 공간 안에서도 좋아하는 걸 책꽂이에 꽂아두거나 벽에 붙여두곤 했어요. 그런 취향은 커서도 이어져 회사의 제 자리 주변엔 잡지나 여기저기서 사 온 물건들이 늘 쌓여 있었어요. 그래서 동료들이 “물건이 너무 많아서 회사 그만두기 어렵겠다.”는 농담도 자주 했죠. 그렇게 모은 오브제들은 업무에도 자주 활용했고요.

 

이런 오브제를 사용하는 일이라면….

아, 제가 예전에 음반 회사에 다녔거든요. 뮤지션 프로필이나 음반 재킷 사진을 찍을 때 소품이 필요하면 제가 모아둔 물건을 자주 썼어요. 아니면 “이거 쓰면 좋을 것 같아요.” 하며 직접 챙겨 가기도 했고요.

 

그렇게 물건들을 소장하다가 빅슬립을 열게 된 계기는 뭐예요?

물건을 모으다 보니 어느 순간 제 방을 넘어서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신발장, 싱크대 상부장, 베란다까지 물건이 놓이게 되더라고요. 어머니는 농담처럼 “민정이는 여기 있는 물건 하나 없어져도 모를걸?” 하시기도 했죠. 저는 원래 오브제들을 한곳에 놓고 바라보고 싶었어요. 또 어렵게 구한 물건들이 구석에 숨어 있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작업실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처음엔 창고 개념으로 공간을 열었죠. 첫 공간은 지금보다 당연히 크지 않았고, 물건을 적재하듯 테트리스처럼 쌓아두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물건이 계속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질 않잖아요. 당시 친구들과 “이걸 어떻게든 순환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그러던 중 마침 지인을 통해 리빙페어에 참여할 기회가 생겨 그때 처음으로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하게 됐어요. 결국 ‘내가 수집을 멈출 수 없다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빅슬립을 열게 된 거예요.

 

‘빅슬립’이라는 이름은 ‘빅Big’과 ‘슬립Sleep’을 우연히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하셨죠.

아마 20대 초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막연하게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거든요. 그래서 어떤 이름을 쓰면 좋을까 고민했고,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노트나 휴대폰 메모장에 자주 적어두곤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따로따로 적어둔 단어들이 하나의 문장처럼 읽히는 걸 보고 ‘빅Big’과 ‘슬립Sleep’을 나란히 붙여봤어요. 두 단어 다 너무 쉬운 말인데 함께 붙였을 때 생기는 묘한 여백이 마음에 들었어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스펠링이라는 점도 좋았고요. 뜻을 찾아보니 ‘죽음’이라는 의미도 있더라고요. 귀엽고 쉬운 단어인데 안에 반전 같은 뜻이 숨어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그 이름을 쓰게 됐어요. 이건 나중에 알게 됐는데,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중에 《빅 슬립The Big Sleep》이라는 작품이 있더라고요. 그게 예전에 흑백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요. 총을 든 형사와 금발의 여인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무드의 영화예요. 스틸컷이 너무 멋지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어요.

 

제품 중에는 판매하는 것도 있지만 비매품도 있어요. 기준이 따로 있나요?

기준은 단순해요. ‘이건 이제 보내줘도 되겠다, 다른 분께 가도 괜찮겠다.’ 싶은 건 판매하고, ‘아직은 옆에 두고 조금 더 익숙해질 때까지 가지고 있고 싶다.’ 싶은 건 팔지 않아요. 평생 떠나보내지 못할 것 같은 물건들도 있죠. 예를 들어, 무라노 글라스Murano glass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그 램프’가 그래요. 중고나라에서 다른 제품을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조명이었는데, 직거래로 실물을 보고는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어디서 구한 건지 여쭤봤거든요. 그분의 시어머님께서 80세가 넘으셨는데,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서 구입하신 조명이라고 하더라고요. 오브제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구하게 된 과정과 이야기가 얽혀 있어서 애착이 생기면 아무래도 쉽게 내놓을 수가 없어요.

빈티지 조명이나 오브제가 많지만, 이곳이 꼭 빈티지에만 머무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소개해 주실래요?

기본적으로는 빈티지 제품이 중심이지만, 새 제품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요. 활동 중인 작가들의 작품을 입점 형태로 판매하기도 하고, 저와 비슷한 취향으로 물건을 모으는 분의 셀렉션이 마음에 들면 함께 소개하기도 해요. 또 자주는 아니지만 입점 작가와 협업해 직접 제작한 상품을 선보인 적도 있고요. 

 

이곳에 모이는 오브제의 기준은 민정 씨 눈에 예쁜 것들이라고요. 주로 어떤 물건이 마음에 들어오나요? 

제가 어떤 물건을 봤을 때 끌리는 기준이 ‘물음표’더라고요. 그냥 예쁘다기보다 ‘뭐야, 이거 뭐야?’ 하면서 어디서 는지, 어떻게 이렇게 생겼는지, 이런 기능을 갖추었는지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것들이요. 귀여운 물건이어도 ‘어떻게 이렇게 귀엽지?’ 하는 물음표가 남는 게 있거든요. 저는 그런 오브제에 마음이 가요. 브랜드도 모르겠고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 정형적이지 않은 것들이요.

 

빈티지 제품에서 그런 매력을 많이 느낄 수 있죠.

맞아요. 빈티지라는 건 오랜 세월 전에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온 물건이잖아요. ‘원앤온리’의 특성도 있고요. 해외에서 온 제품이라면 먼 길을 배와 비행기를 타고, 그 과정에서도 깨지지 않고 온전하게 도착했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고요. 빈티지는 ‘우연’이 많이 작동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물건이니까요. 여행 중에도 그런 순간이 종종 있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길이 막혀서 다른 길로 가거나 예약했던 식당이 취소돼서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꿨을 때 우연히 발견한 물건들처럼요. 만약 그날 그 길로 가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우연이 겹치고 이어져서 만난다는 점이 빈티지를 더 소중하게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이번 호 주제가 ‘선물’이에요. 새 제품이 아닌 누군가가 쓰던 물건을 선물하는 일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빈티지가 선물로도 충분히 괜찮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빈티지는 선물로 조금 더 특별한 ‘한 스푼’을 담을 수 있어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우연과 행운의 순간이 겹쳐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물건이잖아요. 또 선물을 고르러 온 분이 매장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제품 중 단 하나뿐인 그 물건이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순간에 발견되었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선물할 사람을 떠올리며 고심해 고른다는 점에서 단순히 온라인에서 손쉽게 주문할 수 있는 새 제품과는 다르게 느껴지죠. 빈티지 선물은 정성스러운 시간과 우연 그리고 작은 행운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 특별한 선물이 된다고 생각해요. 

 

민정 씨가 선물로 받은 제품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요?

제가 워낙 물건을 많이 모으다 보니까 주변에서는 저한테 선물하기가 부담스럽다고들 하세요(웃음). 그런데 받았을 때 ‘이 사람이 내가 요즘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모으는지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선물이 있거든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마스코트인 곰돌이 ‘미샤’예요. 러시아 전통 상징인 불곰을 모델로 한 캐릭터인데, 경기마다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어서 그게 또 정말 귀여워요. 그런데 어느 날 지인에게 제가 가지고 있지 않던 털로 만든 인형 형태의 미샤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이거 어디서 구했어요?” 하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세심하게 저의 취향을 관찰했다는 거잖아요. 그런 선물은 오래 기억에 남죠.

(제품을 가리키며) 이 곰돌이군요!

맞아요. 안쪽에 더 많이 있어요.

 

대화 끝나면 한번 구경시켜 주세요(웃음). 빅슬립에서는 조명 리페어 숍도 운영하는데, 조명 수리를 시작한 이유가 있나요?

구매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망설이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A/S예요. 저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해요. 빈티지 제품을 살 때는 ‘혹시 고장 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늘 따라오니까요. 그런데 만약 실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건 빈티지라 어쩔 수 없어요.”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면, 책임감 없는 판매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단순한 접촉 불량일 때도 있고, 선을 다시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작동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몰라서 방치하게 되는 건 너무 아쉽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도와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자격증이 있는 전문 수리사는 아니지만, 워낙 빈티지 램프를 많이 다루다 보니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서 배우는 편이에요. 실제로 구매하신 분들 중엔 “불만 켜지면 돼요.” 하시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완벽한 복원이 아니더라도, 손님의 니즈를 충족시킬 만한 선에서 제가 직접 수리를 해드리고 있어요.

 

물건에 책임을 가지고 대하신다는 게 느껴져요.

저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말 많은 빈티지 숍을 다녀봤어요. 그럴 때마다 느낀 건 ‘빈티지’라는 이름 뒤에 숨기가 생각보다 쉽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어 클리닝이 전혀 되지 않은 채로 판매된다든가, 제가 직접 테스트했을 때 버튼이 잘 눌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빈티지라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물건의 불편함이나 결함을 ‘빈티지니까’라는 말로 감추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환불이나 반품이 안 된다는 말도 너무 당연하게 쓰이고요. 하지만 저는 그런 방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당연히 정해진 기간 안에 환불이나 반품도 가능하고, 저희가 판매하는 제품들은 하나하나 정성껏 클리닝한 뒤에 작동 여부를 확인하거나 고쳐서 고객이 받아보는 순간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이곳의 수많은 조명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깊이감이 정말 커요.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황홀하달까요.

손님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시는 질문 중 하나가 “온라인 숍은 없나요?”예요. 아무래도 지방에 계신 분들은 직접 방문하기 어렵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온라인 판매를 병행하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종종 듣지만, 저는 이 공간을 오프라인 중심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빅슬립은 단순한 가게라기보다 체험형 공간에 더 가깝거든요. 실제로 불이 켜진 모습을 보고, 버튼을 누르면서 손끝의 감각을 느끼고, 여러 전구를 직접 끼워보면서 어울리는 조명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구매하실 때는 테스트용 전구를 모두 펼쳐두고, 원하시는 분위기에 맞게 조합을 도와드리기도 해요. 조명은 사진으로 볼 때와 눈으로 볼 때가 정말 다르거든요. 저도 해외 셀러에게 주문하다 보면 생각보다 크거나 작아서 놀랄 때가 많아요. 물론 치수를 재고 구매하지만 숫자로는 느껴지지 않는 볼륨감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곳의 음악과 빛에 둘러싸인 채 천천히 물건을 둘러보는 경험을 해보시길 추천드려요.

A.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379 우측 2층

빅슬립의 추천 선물

70s Germany Peill&Putzler Zebra Textured Frost Glass Dome Head Mushroom Lamp 

| 45만 8천 원

“은은한 유백빛의 무광 유리에 얼룩무늬처럼 결이 들어간 질감이 아름다워요. 개인적으로 버섯 모양 조명을 좋아해서 여러 개 모았는데, 그중에서도 크기나 비율, 질감 모두 균형이 잘 잡힌 조명이에요.”

Germany Squared Wall/Stand Mirror 

| 2만 9천 원

“활용도가 높은 거울이에요. 거울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여 벽에 걸 수도 있고, 세워둘 수도 있죠. 가볍고 얇아서 가방에 쏙 넣어 들고 다니기에도 용이해 부담 없이 선물하기에 좋아요.”

70s Congress Playing Card | 5천 원

“앞면에는 고양이 그림이, 뒷면에는 숫자와 문양이 그려진 트럼프 카드예요. 작은 액자에 넣어두면 귀여운 인테리어 소품이 되고, 스마트폰 케이스 뒤에 끼워 거울 셀카를 찍어도 예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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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