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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뉴의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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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단어,
비누
기원전 2300년경, 아주 까마득한 날부터 우리의 보호막이 되어준 비누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양을 갖추고, 색을 입고, 다양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손만 닦는 목적만 가지지 않고, 1분 만에 샤워를 끝내는 아빠들의 전유물도 아닌 것이다. 연남동 작은 가게의 비누는 좋은 재료를 사용해, 한 달 남짓의 긴 시간을 머금고 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렇게 우리를 깨끗하게 해줄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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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비누와 나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데면데면한 관계. 어렸을 적, 비누와 멀어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나는 하얀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얼굴까지 박박 비비며 씻는 아빠를 동경했다. 그래서 엄마 몰래 샴푸 대신 비누로 머리를 감으며 아빠 흉내를 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아마 <나 홀로 집>에서 케빈이 스킨을 바른 후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치면 항상 엄마가 머리를 정리해주는데, 빗이 한 번 들어가서는 나오질 못하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풀 먹은 옷처럼 빳빳하기만 했다. 한 번의 빗질로 엄마에게 들킨 후, 신나게 등짝을 얻어맞았고 또다시 머리를 감아야만 했다. 비누와의 추억은 그렇게 끝이 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비누와 대면하게 된 곳은 천연비누를 만드는 가게였다. 나무 선반 위에 가지런히 줄 서 있는 비누의 모습은 내게 트라우마를 안긴 그것과 달리 순하고 착해 보였다. 색도 고운 것이, 내게 어떤 생기를 줄 것만 같았다. 매번 화려한 패키지에 속아서 샀던 화장품들과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빤한 여자의 심리가 머릿속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품 설명서에는 클로렐라, 어성초 등 어디서 얼핏 들었던, 피부에 좋다는 재료가 들어갔다고 쓰여있었다. 내 마음은 금세 움직였다. 그런 나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읽은 걸까. 한 여자가 다가와 비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송혜정이라는 이름, ‘비뉴’의 대표였다. “대부분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재료로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안전하지만, 절대적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무리 좋은 음식이어도 맞지 않는 사람이 있잖아요. 재료를 선택할 때 피부에 자극을 덜 주면서 제 기능을 잃지 않는 것을 선정해 레시피로 만들고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전통기법이기 때문에 비뉴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전통기법’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두터운 손으로 장맛을 좌지우지하는 퉁퉁한 할머니를 연상케 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진 이야기를 들은 후, 그것이 전혀 관련이 없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대로 이어져 온 역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만의 확고한 레시피가 있었고, 숙성과정을 통해 천연비누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시간을 공들여 장을 담그는 할머니의 모습과 비슷했다. “계절과 날씨, 들어가는 성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시간 정도가 소요돼요. 비누를 다 만들어도 과정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하루 넘게 보온을 시킨 뒤, 한 달 넘게 건조숙성을 하며 피부 세정에 알맞은 PH 농도(수용액의 산성, 알칼리성의 수치)를 맞춰야 해요. 생각보다 느린 시스템이에요.”
눈과 눈이 만나는 일
연남동을 여러 번 가봤지만 비뉴가 있는 골목은 처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조금만 더 가면 아는 건물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한 번 더 가본다고 해도 단번에 찾을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내게는 낯선 곳이어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이곳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한 접근성을 고려해 온라인 위주로 판매하겠거니 했는데, 또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블로그에는 ‘수다’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리는 친근하고 담백한 글이 올라왔다. 그녀는 가끔 비누가 섹시하다며 비누와의 대화를 시도했고, 슈가솝을 애용했다는 마릴린 먼로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흑설탕 비누를 소개하는 등 어설프고 귀여운 홍보를 하고 있었다. “저는 무엇을 할 때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같은 예술작품을 통해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인데요. 비누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들을 블로그에 그대로 옮겨 쓰죠. 비누의 효능이나 재료를 일반적으로 나열하기보단 짧은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여러 형식의 글이 나온 것 같아요.” 작은 규모의 브랜드들은 SNS를 통해 제품들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송혜정 대표는 온라인 판매에 치중하기보다 사람들이 직접 가게를 찾아오길 바란다고 했다. “손님들에게 어떤 과정을 통해 비누가 만들어지며 또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설명해드리고 싶어요. 그게 정확한 정보전달도 되지만 저에게도 빠른 피드백이 돌아와서 좋거든요.” 자신이 만든 제품의 단점을 말할 수 있는 대표가 몇 명이나 될까. ‘비뉴’를 알리기에 앞장서는 것보다 ‘비누’의 성격을 차근히 소개하는 그녀가 참 괜찮은 대표자로 보였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애초에 기대치를 좀 낮춰서 말씀드려요. 하루아침에 좋아지는 게 아니고 꾸준히 사용해야지 효과를 볼 수 있다고요. 그리고 천연비누는 잘 무르는 편이어서 꼭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 뚫린 거치대를 사용해야 한다는 정보도 전해요.” 덧붙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누에 대한 잘못된 상식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세게 닦을수록 청결하다고 생각하는데, 피부가 놀랄 정도로 뽀드득하게 씻는 경우에는 수분막이 사라지면서 피부가 건조해져요. 부드러운 동작으로 꼼꼼히 씻어주세요.”
청결의 상징
사실 내게는 비누에 대한 편견이 하나 있다. 비누에 들어있는 재료의 성질 때문이라기보다, 거품을 없애기 위해 반복하여 씻어내는 과정에서 깨끗해질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 언젠가 일기에 대단한 발견인양 썼던 내용이다. 이런 상황만 봐도 비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꾸준히 써왔지만, 정작 ‘왜’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질문들이 뒤늦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척 이외에 비누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천연비누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비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세정과 보습효과가 주된 역할이지만 비누를 쓰면서 노동과 시간의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어요. 그리고 화학 성분과 방부제가 아닌, 천연재료로 만든 비누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착한 소비에 동참할 수 있어요. 또한, 비누화 과정에서 천연 글리세린이 생성되어 보습이 뛰어나죠.” 하지만 이렇게 좋은 비누라 할지라도 쏟아져 나오는 세정제 무리 속에 살아남기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비누를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비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손 닿기 편한 곳에 있고, 어떤 부위에 어떤 용도로 써도 무방하다는 점이 곧 비누를 쓰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대로 비누는 항상 세면대 옆자리를 지키는 흔하디흔한 물건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편하고 강력한 세정제가 나와도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건, 비누처럼 든든하고 깨끗한 이미지와 믿음을 주지 못해서가 아닐까. 결국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익숙한 그것을 들고, 몸을 닦으며 콧노래를 하는 우리, 혹은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비누 하나로 너무 먼 생각까지 한 것일까 싶지만 지친 몸을 씻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노곤하고 평온해져서 앞선 생각을 하고 만다. 어쩌면 그녀가 언급한 ‘시간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시, 비누
조용히 카드결제가 되는지 묻는 내게 그녀가 작은 선물을 건넸다. 캐러멜색의 산양유 비누였다. 모유와 가장 비슷한 구성성분으로 영양이 풍부해 촉촉함과 부드러움을 자랑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겨울을 보내면서 거칠어진 피부가 신경 쓰였는데 뜻밖의 선물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평소라면 잠들기 전까지 미루고 미뤘던 세안을 빨리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의 말대로 구멍이 뚫린 거치대를 꺼내 네모난 비누를 올렸다. 손에 물을 묻힌 후 비누를 돌려가며 거품을 냈다.
그 과정은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이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모으며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태초의 비누를 쓰는 것 같았다. 아빠가 썼던 동그랗고 하얀 비누, 장롱에 깊숙이 있던 연보라색 비누, 시골집에 항상 있던 오이향 비누….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신이 났다. 하루 만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좋아진 것만 같은 피부에 거울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봤다. 어쩐지 원래 쓰던 세안제들은 한동안 목욕탕 구석으로 물러나 있을 것 같다.
비뉴의 비누
비뉴에서는 매월 캔들과 비누를 만드는 클래스가 열리고 있다. 캔들과 마카롱 비누를 만드는 수업은 약 2시간 동안 진행이 되며, 천연비누 수업은 2시간 30분 내외로, 총 4회에 걸쳐 진행된다. 보통 서너 명 정도의 적은 인원만을 받고 있으니 문의는 웹사이트보다 전화로 하는 것이 좋겠다.
01. 진주 비누 PEARL SOAP
진주에는 아미노산과 천연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어 피부 노화를 막아줄 뿐 아니라, 혈액순환 세포 재생을 촉진하고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해준다. 비뉴의 인기 제품이다. 가격 1만 3천원
02. 마르세유 비누 MARSEILLE SOAP
올리브오일 70퍼센트와 코코넛, 시어버터, 팜 등이 함유된 비누다. 조밀한 거품으로 불필요한 노폐물을 제거하고, 피부에 유익하고 건강한 피지는 지켜줘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가격 1만 4천원
03. 카렌듈라 비누 CALENDULA SOAP
카렌듈라는 서양에서 민간요법으로 널리 사용되는 허브로, 피부 트러블 및 상처치유에 효과가 있다. 비뉴에서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달맞이유와 동백유를 함께 첨가한 비누를 만들었다. 가격 1만 3천원
04. 토르말린 비누 TOURMALINE SOAP
미네랄이 풍부하고 피부노화의 주범인 활성산소 제거와 혈액순환에 좋다. 트러블이 자주 나는 피부에 적합하고, 거품이 풍부해서 자극 없이 부드러운 세안이 가능하다. 가격 1만 3천원
05. 가슬 비누 GHASSOUL SOAP
가슬은 모로코에서 나는 진흙으로 미네랄이 풍부해 거칠어진 피부를 매끄럽고 촉촉하게 해준다. 숯보다 4배 강한 흡착력으로 유분을 깔끔하게 없애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분 부족형 지성 피부타입에 추천한다. 가격 1만 3천원
06. 클로렐라 비누 CHLORELLA SOAP
클로렐라는 피부의 독소배출, 영양공급, 노화방지 등의 효과가 있다. 화학성분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비누로, 피부의 자생력을 도와 중년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제품이다. 가격 1만 3천원
07. 카스틸 비누 KASTIL SOAP
유기농 올리브오일 100%로 만든 비누로, 올리브가 많이 재배되는 지중해연안 ‘카스틸’지방에서 유래되었다. 유럽각지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유일한 비누. 자극이 없고 보습력이 뛰어나서 아토피나 악건성 피부에 좋다. 가격 1만 5천원
08. 어성초 비누
어성초는 제주도와 울릉도에서 자라는 삼백초과다. 이미 피부 미용으로 유명해진 식물. 강력한 향균효과로 독소를 배출해줘 여드름에 좋으며 피부진정에도 도움을 준다. 가격 1만 3천원
에디터 이혜인
포토그래퍼 박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