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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다정함
선운사에 다녀왔다. 10년 만이다.
처음 언제 선운사에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한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12월 중순이 넘어가자 연말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온 도시가 들뜬 공기로 가득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살다 보면 그런 연말이 있다. 딱히 약속이 없었고 시간은 많았다. 약속을 만들려면 만들 수야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 어디 가지? 국내 여행은 혼자 안 해봤는데 괜찮을까? 크리스마스에 붐비지 않는 곳이 있을까? 그때 고등학교 시절 한문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한적한 곳은 절이다.”라는 이야기. 선생님은 웃으라고 해주신 말씀이었겠지만,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크리스마스의 절은 과연 어떨까?
성남시 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고창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선운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평소 절을 좋아해서 어느 절이든 종종 가는 편이었지만, 선운사는 처음이다. 2박 3일 머물 방을 안내받았다. 단출한 이부자리만 있는 네모반듯한 작은 방이었다. 개별 화장실도 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깔끔하다. 안내하시는 분이 개량 한복처럼 생긴 옷을 나눠 주었다. 절에 머무는 동안 내내 이 옷을 입고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졌다. 방에 놓인 안내문 맨 위에는 가능하면 신문이나 휴대폰 등을 보지 말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지금에 머무르란 이야기겠지. 잘 찾아온 것 같다.
2박 3일 동안 몸의 어느 곳 하나 부대끼지 않는 부드러운 옷을 입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시간을 보냈다. 뜨끈한 방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워 쉬었고, 목탁 소리에 눈을 떴고, 새벽 예불을 봤고, 아침을 먹었고, 선운사 주변을 산책했고, 선운산 등산도 가볍게 했다. 저녁 예불을 보고 스님과 차담도 나눴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만세루에서 시간을 보냈다.
만세루는 선운사에만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사방의 문이 활짝 열린 너른 마루에 열 개가 넘는 나무 찻상이 놓여 있다. 만세루를 찾은 모든 이들에게 선운사에서는 직접 키우고 수확해 제다한 차를 다기와 함께 무료로 내어주었다. 각자 편안하게 차를 내려 마시면 된다. 그때 만세루에는 찻상 세팅을 도와주는 보살님이 한 분 계셨다. 혼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보살님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쩌다 절에 머물게 되었는지, 주로 보살님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찻물이 떨어졌고, 나는 곧바로 일어나 물을 길어 왔다. 그때부터 절에 머무는 동안 물을 길어 오는 건 내 담당이 되었다. 내가 떠 온 약수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고요히 앉아서 오래된 나무 사이 바람과 햇볕을 느끼다가, 물이 떨어지면 천천히 일어나 고무신을 꿰어 신고 약수를 떠 왔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떠올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선운사 입구에서 파는 선운황차를 샀다. 그리고 차가 떨어질 때 즈음 다시 선운사에 갔다. 그 뒤로 마음이 복잡할 때도 선운사에 갔고, 마음이 복잡하지 않을 때도 갔다. 선운사는 언제든 고민 없이 계획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나를 반겨주는 게 사람이 아니라 절이라는 점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 언젠가는 어떤 분이 나한테 “여기서 생활하는 분이세요?”라고 묻기도 했다. 아니에요. 저도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중생일 뿐이에요. 물어본 사람은 멋쩍게 사과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어울린단 이야기는 늘 듣기 좋다.
혼자 갈 때도 있었지만 친구나 애인과 갈 때도 있었다. 언제 누구와 가도 좋았다. 선운사에 머무는 동안 함께 간 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선운사 템플스테이가 왜 좋냐고 누군가 물으면, 숨도 안 쉬고 답한다. 혼자 가도 되고, 절 옷만 입으면 마음이 편해지며, 고무신을 신고 걷는 일이 좋고, 선운산이 아름답고 별이 정말 많이 보인다고. 고기와 생선은 물론 오신채도 들어가지 않은 전라도 절밥이 정말 맛있고, 차도 편하게 마실 수 있고, 무엇보다 머무는 동안 불필요한 말과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고, 그러는 사이 속세의 걱정과 근심이 가벼워진다고. 선운사는 그런 곳이다. 도시의 옷을 벗고, 내가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10여 년 전 제주로 이사하는 길에 선운사에 잠깐 들러 삼배를 하고, 근처 자주 가는 식당에서 장어 정식을 먹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번 호에 ‘전주’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선운사가 떠올랐다. 선운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 버스를 한 번 더 타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종종 전주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한옥마을로 가 칼국수를 먹곤 했다. 먹기 위해서는 귀찮음쯤은 가볍게 극복하던 단순한 시절이다. 그래, 나는 나의 선운사 이야기를 해야지.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걸. 그러다가 문득,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 거다. 언제까지 예전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쓸 거야. 지겹다. 지금 이야기를 쓰고 싶다. 다시 갈까? 가자. 가면 되지.
제주에서 광주 공항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공항에서는 렌터카를 빌려서 이동할 예정이다. 나의 계획을 들은 친구가 동행하기로 했다. 마치 고향에 가는 것처럼 설렌다. 공항에서 선운사까지는 차로 한 시간. 늘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을 렌터카로 이동하니 어엿한 어른이 된 듯한 기분도 든다. 선운사야 기다려라, 어른이 간다. 선운사의 최근 정보에 대해서는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10년 전 수없이 드나들던 선운사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나는 많이 변했지만, 그렇지만.
예전엔 절 안에서 머물렀었는데, 이젠 템플스테이 용 건물이 따로 있다고 한다. 절에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 건물 앞에 주차도 가능하다. 우리 방은 무려 2층이다. 방 안에 침대도 있다. 부드러운 촉감의 옷을 나눠 주었다. 템플스테이를 안내해 주신 보살님께 “혹시 고무신은 없나요?” 물었더니,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듣는 눈치다. 다음엔 고무신을 챙겨 와야겠다. 새로운 공간은 조금 낯설었지만 나눠준 옷으로 갈아입자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거 어떤 마음인지 아주 잘 알지. 오랜만에 만나는 마음이 반갑다. 선운사까지 산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우선 대웅전에서 삼배를 한 후 곧장 만세루로 갔다. “차 마실 수 있나요?” 스님이 말씀하신다. 만세루는 어제까지 1년 넘게 지붕 공사를 했단다. 오늘 아주 오랜만에 다시 개방되었고, 차는 아직 준비되지 않아 내일부터 마실 수 있다고 했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차를 마시지 못할 뻔했다. 아니 만세루를 못 볼 뻔했다. 휴. 만세루에 앉아서 우뚝 솟은 가까운 산을 바라봤다. 아직 더운 날씨, 에어컨이 없었지만 시원했다. 차 대신 약수를 떠다 마신다. 충분하다.
다음날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어두운 숲길을 걸어 선운사로 갔다. 발목 높이에 조명이 켜 있어 길잡이가 되어 준다. 젊은 스님이 목탁을 치며 캄캄한 도량을 천천히 걷고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도량석이라고 한다. 도량을 정화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예전엔 저 목탁 소리로 눈을 떴는데, 오늘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깼다. 글쎄, 방 침대에는 무선 충전기까지 달려 있었다.
예불이 끝나고, 아침 공양 시간을 기다리며 아무도 없는 만세루에 친구와 나란히 앉아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몸에 닿는 부드러운 나뭇결이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한다. 고요히 앉아 생각했다. 글은 항상 나를 멀리 데려온다. 덕분에 나는 10여 년 만에 다시 만세루에 앉아 있다. 날이 천천히 밝아오고 친구 얼굴이 점점 선명해진다. 아침을 먹고, 다시 만세루에 앉았다. 그러다 우연히 차를 만드시는 스님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다. 차 밭을 관리하고 수확하고 덖는 것까지 모두 도맡아 하신다고 한다. 점점 힘에 부친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어떤 차인지도 모른 채, 선운사 차라고 좋아하며 마시던 나는 10년 사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고 선운사 발효차는 청차일까 황차일까 그 중간 어디쯤일까 궁금했지만 자세히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대신 선운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차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마시고 있는 차의 잎이,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 주변에서 자란 나무에서 딴 것이라는 사실이 좋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기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선운산의 아침 안개는 고요하고, 만세루는 모두를 향해 열려 있으며, 스님들은 새벽 3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신다. 대웅전이 있는 곳이 절이 아니라 스님이 계신 곳이 절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선운사에서 만난 스님들이 해주신 이야기를 모두 옮겨 적지는 않기로 한다. 일부는 마음에 잘 담아두었고, 나머지는 선운사에 두고 왔다.
나에겐 선운사가 있다. 언제든 가벼운 몸으로 찾아가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나올 수 있는 곳이다. 다시 언제 또 선운사에 가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기에 선운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된다. 내가 만일 “같이 선운사 갈래?”라고 묻는다면, 당신을 정말 좋아한단 이야기다. 오래, 알고 지내고 싶단 얘기다. 나랑 선운사 갈래요?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