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 지점에서 치유가 필요할 때

당신을 위로해줄 한 잔

삶의 한 지점에서 치유가 필요할 때

당신을 위로해줄 한 잔

<호타루의 빛>이란 일본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은 귀여운 ‘건어물녀’다. 회사에선 깔끔한 이미지로 커리어 우먼다운 면모를 뽐내는 호타루는 퇴근 후 맥주를 외치며 집에 온다. 그리고는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맥주를 한 캔 따서 벌컥벌컥 마신다. 하루 중 호타루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모든 사람에겐 영혼을 치유해줄 한 잔이 있기 마련이다.

임병진 바텐더의 칵테일 ‘페니실린’
매거진 《바앤다이닝》 에디터 장수연

거의 10년차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마감은 늘 괴로워요. 특히 취재가 몰려있으면 최악이죠. 그날도 그랬어요. 써야 할 원고가 산더미인데 점심, 저녁 모두 중요한 와인 행사가 있었어요. 모두 특급 호텔의 풀코스 식사였죠. 남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매끼를 그렇게 먹으면 힘들어요. 특히 와인 행사는 요리와 와인 테이스팅, 인터뷰(심지어 외국인)까지 더해져 부담감이 백배죠. 아니나 다를까 더부룩한 속을 안고 밤늦게 퇴근했어요. 거한 식사와 와인의 비릿함을 날려줄 한 잔이 필요했죠. 한남동으로 갔어요. ‘마이너스’라는 괜찮은 바가 있거든요. 평소 안면이 있던 바텐더를 붙잡고 증상을 호소했어요. “피곤하고 배는 부른데 속은 안 좋고 묵직하면서도 상큼한 게 당겨요. 그런데 토닉이나 피즈 종류는 너무 가볍고요. 아, 저 위스키 좋아하는 거 아시죠?”라며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했는데 실험실 시험관처럼 생긴 글래스에 노르스름한 액체가 담겨 나왔어요. ‘페니실린’이래요. 맞아요, 우리가 아는 그 항생제 이름. 마셔보고 깜짝 놀랐어요. 진짜 약처럼 제가 말한 모든 증상을 완화해주더라고요. 생강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소화도 되는 거 같고 직접 짜낸 레몬 주스가 더없이 상큼하더군요. 거기다 또 베이스는 위스키래요. 갑자기 신이 났어요. 마감인 것도 잊은 채 술판이 벌어졌죠. 이럴 때 보면 바텐더는 의사 같기도 하고 점쟁이 같기도 해요. 돌이켜 보니 그렇네요. 제일 맛있던 요리, 가장 좋았던 여행 이런 것들에도 항상 사람이 있었죠. 결국 위로가 되는 건 ‘한 잔’보다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인 것 같아요.

식사 후 마시는 연남동 수박 주스
뮤지션 최낙타

그 당시 만나던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수박 주스를 마셨어요. 주문을 하면 미리 잘라 놓은 수박을 얼음과 같이 믹서에 갈아 컵에 따라주는데 수박의 향과 맛, 그리고 얼음과 같이 갈아 슬러쉬 같아진 적당한 질감이 좋았죠. 그렇게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입안에 남아있던 음식물의 찝찝함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상쾌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어요. 그보다 더 좋은 건 나와 그 친구가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는 것. 상대와 내가 같은 느낌이라고 확신한 순간은 거의 없었는데, 그 순간은 분명 완벽한 공감이었어요. 왜냐하면 한 모금 마시자마자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으니까요!

정오의 맥주
《어라운드》 에디터 김혜원

저는 사실 술을 즐기지 않아요. 낮술은 더더욱. 스물다섯 살, 잡지사 어시스턴트를 시작하며 맥주를 찾게 된 것 같아요. 당시 회사 근처에 라멘 집이 하나 있었어요.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간 어시스턴트 친구가 라멘과 함께 맥주를 주문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따라서 주문했죠. 어시스턴트는 괜히 서러워질 때가 많은 자리예요. 그때 쓴 일기나 메모는 대충 이런 내용이죠. “바닥에 끌리는 내 발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전화를 잘해야지.”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하며 보낸 그 한 시간만큼은 회사가 아닌 것 같았어요. 오후에는 처리해야 할 새로운 일이 있었지만,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쪼그라든 제 어깨를 펴주더라고요. 그때부터 종종 정오의 맥주를 마십니다. 물론 이건 제가 맥주 한 잔에도 얼굴이 시뻘게지는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공연이 끝난 후 동료들과 마시는 소주
배우 류경환

중독까진 아닌데 전 굉장한 애주가예요. 자주 마실 땐 일주일에 8일을 마신 적도 있죠. 기쁠 땐 기뻐서 마시고, 슬플 땐 기쁘고 싶어서 마시고, 지칠 때는 기뻐지고 싶어서 마시고…. 중독인가. 중독이네요. 어쨌든 그 한 잔은 제 삶의 무게예요. 숙취가 심해서 거하게 마신 다음 날은 하루 종일 시체가 되거나 고생을 하거든요. 음, 왠지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 한 잔이 없으면 안 되죠.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블랙커피
아티스트 에드워드 쿠시베리Edward Cushenberry

나는 하루 종일 커피를 마시지는 않아요. 어느 특정한 때만 마셔요. 예를 들면, 늦은 밤 저녁밥을 먹으며 마시거나 또는 저녁을 다 먹은 뒤에, 스튜디오에 있을 때, 친구들을 만날 때, 아니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파이와 함께 마셔요. 이렇게 쓰고 보니 종일 마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블랙커피는 스트레이스면서 동시에 저를 차분하게 만드는 한 잔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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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혜미

일러스트 에드워드 쿠시베리 Edward Cushenbe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