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조심할 것

행복하고 싶어요

오래전 여행사 광고 중에 ‘금까기 여행’이라는 것이 있었다.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니는 그런 여행. 어느 해 겨울, 나는 마치 금까기 여행을 온 관광객처럼 쉬지 않고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시청에 갔다 종로에 갔다 광화문에 갔다…. 왜 그렇게 도시를 싸돌아다녔는가 생각해 보면, 이제 와 솔직히 이야기하건대, 외로워서였던 것 같다. 물론 그 겨울엔 전혀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심하다거나 지루해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오히려 좀 더 건강한 사람인 것 같다. 지금은 물론 예전에도 혼자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외로움이나 지루함이나 심심함이나 뭐가 됐든 그런 것들을 피할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동호회를 나가거나. 하지만 나는 동호회에 나가는 등의 해맑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어두운 방 안에 갇혀서 어두운 영화나 보고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때때로 튀어나가듯 아무 생각 않고 집을 나섰는데, 중요한 것은 매일 밖으로 나가면서 단 한 번도 우연을 기대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작가와 창작자가 산책을 사랑하지만 난 조금 조심스럽다. 혼자서 하는 산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재밌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해물데이트’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식당. ‘본 뼈’라는 완벽한 이름의 뼈해장국집. 남몰래 발견한 산책길도 있었고, 파출소 뒷마당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꽃집도 있었다. 이런 재밌는 일들을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보았다면 정말 낭만적인 하루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 대박!’ 하고 갈 길 가는 익숙한 여행자의 풍경. 영락없이 혼자 여행 오는 사람들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종종 혼자 걷는 사람들의 눈을 바라본다. 왠지 기운 없어 보이는 그들의 눈. ‘오 대박!’, ‘오 정말 신기해!’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즐거운 표정을 지어도 혼자서 걷는 사람들은 그놈의 눈 때문에 그리 신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데, 안 슬픈데 슬퍼 보이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기운 없는 눈은 사람을 슬퍼 보이게 만들고 억울하게 만든다. 그렇게 기운 없는 눈으로 하는 산책은 이 넓은 곳에서 오히려 나를 가두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은 산책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외로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차라리 재봉틀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집에서 색칠 공부를 하든가 아니면 쏘다니며 쇼핑을 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산책은 정말 위험하다. 하지만 단 한 번, 정말 단 한 번 산책을 하다가 우연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어차피 읽지도 않을 작은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얇은 재킷을 챙겨 입고 거리로 향한 날이었다. 당시 살고 있던 곳은 광화문이었고 또 마찬가지로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집에 돌아올 생각이었다. 걷다 보면 발길을 따라서 인왕산 끝까지 올라갈 때도 있었고, 서울역 인근까지 걸어갈 때도 있었다. 우연은 거의 인정했을 무렵이었다. 그날의 산책은 경희궁이었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현대에 재건된 궁이라 너무 새것이고 그 궁을 둘러싼 곳은 운동장이나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 있었기에 언제나 스산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가끔 주말에 사람들이 와 돗자리를 펴고 있기도 하지만 어쩐지 아파트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궁이라기엔 을씨년스러운 장소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곳이 아니라면,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어쩐지 이방인이 된 느낌이 들어 오히려 불편했다.
그날 산책에서 발견한 우연은 다음과 같았다.

1번: 유아차에 개가 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음
2번: 유아차에 사람이 탄 줄 알았는데 개가 있었음
3번: 바닥에서 카드 주움

바닥에서 카드를 줍는 순간엔 영화 〈녹색광선〉(1986)이 떠올랐다. 특별한 우연이 자신에게 다가와 주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바닥에서 카드를 줍는 우연을 마주한다. 카드는 무언가 우연한 일이 생길 암시 같지만 그래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카드만 거듭해 나타날 뿐이다. 바닥에서 주운 스페이드 에이 카드를 들고 공터를 지나 저 멀리 궁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쩐지 이 장소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울타리를 색칠한 걸까? 청소를 깨끗이 했나? 평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새로운 기분이었다. 지루한 길을 쭉 걸어 경희궁을 둘러싼 담장을 돌아가는데 담장 사이로 삐져나온 나뭇잎들도 평소와는 달랐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고, 저 높은 곳에는 꾹 짜면 물이 나올 것 같은 연두색 잎사귀들이 막 돋아 있었다. 나무가 막 간지러워 미치는 것처럼 온몸에 작은 잎사귀가 가득 돋아 있었다.

“아, 봄이구나. 봄이 왔다!”

그해 겨울 나는 미처 봄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봄이라는 것을 잊고 지냈다. 나는 마치 나에게만 주어진 우연을 만난 것처럼, 마치 봄이 나에게만 주어진 우연인 것처럼, 그 순간 모든 기쁨을 혼자 독차지해 버렸다. 

4번: 봄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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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한승재―푸하하하프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