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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방
보라보라 사람들
글을 쓰는 방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연달아 끝내고 겨우 막차를 탔다. 집에 돌아오니 아침에 켜두고 나간 스탠드 빛이 방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후 비로소 몸을 펴고 누웠다. 허리가 뻐근했다. 눅눅해진 침대보에 팔다리를 비비다가 문득 마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일어날 힘도 없었다. 가만히 천장을 보니 구석에 곰팡이가 보였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보라보라섬을 떠난 지도 일 년 반이 지났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러 돌아왔는데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를 벌다 보니 결국 공부를 못 하는 이상한 꼬리잡기를 한 지가 벌써 일 년 반이 지난 것이다. 매 순간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어쩌면 전부 자기 합리화일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해
딴 생각을 하자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바로 다른 일을 하라던 심리치료사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그런 생각은 마주하고 싸워봐야 더 센 놈을 불러올 뿐이니 상대해주지 말라고 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었는지 확인하고, 영상통화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는 동안 핸드폰에는 내 얼굴이 먼저 떴다. 형편없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남편의 졸린 얼굴이 나타났다. 보라보라섬은 아침이었다. 더 자라고 말하자 그는 막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며 괜찮다고 했다. 이발을 했는지 도토리처럼 반들반들해진 남편이 내게 물었다. “Ça va?” 아주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남편은 다 안다는 듯 화면을 움직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곧 침대 위쪽에 심드렁하게 누워 있는 검은 고양이가 화면에 잡혔다. “주드야.” 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귀가 쫑긋 움직이긴 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드야. 주드야. 계속 부르자 저 인간이 지금 대체 뭐라나,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결국 제 몸을 일으켜주었다. 쭈욱. 앞발로 침대를 밀며 엉덩이를 뒤로 잔뜩 빼고 기지개를 켜더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남편에게 다가간 것이겠지만, 화면에 점점 크게 잡히는 뚱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전화를 끊고 나자 조금 기운이 났는지 생산적인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를 닦자. 치과 진료는 비싸잖아. 몸을 일으켰다. 이를 닦고 나니 샤워를 할 수 있었고, 샤워를 하고 나니 이대로 마감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스. 얼른 커피를 내려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켰다.
그러니까 원래 쓰려던
이야기는 말이야
바탕화면에서 “어라운드 9월호_방_프리라이팅”이라고 적힌 문서를 더블 클릭했다. 주제와 관련해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둔 것이다. 나의 글쓰기 습관 중에서 첫 번째 단계이자, 제일 좋아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프리라이팅을 강조한 작법서에 나온 윌리엄 스태퍼드 시인의 말은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두기까지 했다. “작가란 이야깃거리를 가진 사람이기보다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이야깃거리를 불러내는 과정을 발견한 사람이다.”
언제부턴가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고, 즐거울 때는 불안하거나 막막한 것들에 대해 쓰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현재 상태와 반대되는 감정이나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남편은 연주자들이 악기를 튜닝하듯 글의 톤을 맞추려는 거 아니냐고 말했지만, 오히려 내 정서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인 것 같다.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것일지도. 이번 프리라이팅에는 여행하거나 지내면서 좋았던 방에 대한 글이 잔뜩 적혀 있었고, 그걸 보니 내 심리 상태를 알 만했다.
1. 고양이가 있는 방 / 보라보라섬
2. 위도와 경도가 완전히 다른 낯선 여행지의 방 / 콜카타의 도미토리
3. 빈대에 뜯겼지만, 발코니에서 산이 보이는 방 / 크라이스트처치의 도미토리
4. 새벽에도 룸서비스가 되는 방 / 타히티의 호텔
5. 오래 살아 정든 방 / 서울
6. 이사한 후의 새 방 / 보라보라섬
어떤 방에 대한 글이 가장 쓰고 싶은지 잠깐 고민했지만 사실 내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글과 사진이 올라가는 매거진이다 보니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게 우선이었다. 사진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여행지가 높을 것 같아 그곳들에 대해 먼저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삼천 원짜리 도미토리부터 호텔까지 다양했다. 밤 기차를 타고 거리에서 팬케이크를 사 먹으며 다양한 숙소에 머물던 기억을 계속 떠올리며 쓰다 보니 점점 흥이 올랐다. 결국 나답지 않게 날을 새버렸다.
글을 쓰는
방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노트북을 켰다. 외장하드를 연결해 오래된 사진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여행지의 숙소 사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다만 기억보다 사진 속의 방들이 훨씬 깔끔하고 쾌적해 보였다. 심지어 한 곳은 침대와 벽에 누런 얼룩이 있어서 눕기만 해도 벼룩이 옮을 것 같았는데, 사진으로는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좋아 보이는 앵글로만 찍었을지도 모른다.
새벽에 쓴 글은 더했다. 일상이 우울한 만큼 재미난 것들에 대해 쓰려고 노력했던지라 글이 뽀송뽀송했다. 분명 여행 당시에도 지질하고 비겁한 마음들이 있었는데 어디에서도 그 뒤틀림이 보이지 않았다. 더러운 얼룩을 다 피해서 찍은 사진처럼, 눅눅한 생각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쓴 글을 다시 읽고 있자니 덜컥 겁이 났다.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내가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쩌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느끼는 박탈감을 나 역시 누군가에게 주고 있는 거면 어쩌지.
결국 첫 문장부터 다시 썼다. “남들에게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겨우 이겨내고, 여행지에서 만났던 가장 멋진 방들에 대해 쓰려고 한다.”라는 문장을 지우고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연달아 끝내고 겨우 막차를 탔다.”라고 썼다(맞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글이다). 보기만 해도 힘 빠지는 첫 문장을 감당하며 나머지를 써 내려가다 보니 처음 글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게 되었다. 하룻밤 샜다고 골골대느라 속도가 느려져 며칠이 더 걸렸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눈치를 챘겠지만 여기까지 이 글은 ‘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방에서 쓴 ‘글’에 대한 이야기였다.
돌이켜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언니와 방을 나누어 썼고, 대학에서는 기숙사, 여행을 가서도 거의 도미토리, 결혼하고는 남편과 함께 지냈다. 그런 내게 방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건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간절해졌다. 어디선가 뮤즈가 나타나 창작을 도와주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한 스티븐 킹조차 뮤즈는 지하실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그곳으로 내려가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했고, 카페는 너무 시끄러웠다(사실은 너무 게을렀다).
그러다 언니가 내 방을 하나 내어주며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책상을 사고, 의자를 사고, 스탠드를 사고, 쿠션을 사고, 무엇보다 책을 잔뜩 샀다. 요즘은 네 개의 각기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책상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지만, 덕분에 가끔이나마 한심한 글들을 쓰게 되었다.
글·사진 김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