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되는 종이 9

마음이 수다스러워지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마음이 수다스러워지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9화 책방

한 책방의 점주분이 했던 말이 종종 생각난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의 책방에 출근하고 있지만, 하루가 시작된 기분이 드는 순간은 바로 첫 손님이 들어올 때라고 한다. 그러니까 첫 손님이 들어오는 그 순간이 바로 책방의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내가 책방을 운영한다면 어떨까? 첫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에 오늘의 긴장이 시작될 것 같기는 했다. 한번 상상해 보니, 상상 속 책방이 아닌 카페에서 일할 때의 오전 시간이 떠올랐다.

청소와 준비를 마치고 나면 금세 카페 영업시간이 된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나를 위한 커피 한 잔을 내리는데 몇 모금이나 편하게 마실지는 알 수 없다. 전날에는 커피 한 잔을 온전히 마실 때까지 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며칠 전에는 나의 커피는 내리지도 못할 만큼 바빴다. 카페의 오전은 고요해 보이지만, 실은 오늘의 바쁜 파도가 몰아치기 직전의 잠잠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역시 카페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페의 시작 커튼은, 무얼 주문할지 모르는 손님의 입장으로 시작된다.

좋아하는 책방 문이 매일 열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떤 시작이 그려지는지 상상하는 건 왜일까. 어쩌면 내 일상에 시작이라는 키워드가, 시작이라는 감각이,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은 아닐까.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는 건 매번 다른 흐름에 나를 적용하며 당장의 쓰임을 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매일 같은 시작점을 마주하기란 어렵기만 했다. 매번 다른 일, 전에 한 일과 비슷한 일, 새로운 이야기, 처음 겪는 사람, 전에 없던 방식, 생계만을 위한 일, 오늘의 내가 아닌 몇 개월 뒤의 나를 위해 애쓰는 하루하루. 시작과 끝이 분명치 않고, 얼추 절취선만 임시로 그어 놓고 그걸 지나쳐버리기 쉬운 나날들.

나에게도 책방이 가진 고유의 시작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 주에 몇 번씩이나 책방으로 향했다. 일을 하던 중간에 동네 책방을 목적지 삼아 산책을 나서야만 했다. 처음 입장한 손님이 책방의 시작이라면, 사실 모든 방문을 수많은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라도 시작의 장면에 놓이고 싶었다. 책방에 막 입장한 손님도, 이쪽만의 시작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책방 안을 걷는 일만으로도 마음속은 들끓기 시작한다. 빽빽하게 진열된 책들이 주는 힘이 있다. 이런 이야기도 있고 저런 이야기도 있다는 걸, 내 책상 내 작업대 내 공간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들다. 갑자기 던져진 단어에 한 방 먹게 되는 것처럼, 갑자기 마주한 책에서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작은 알맹이를 만나게 된다.

그런 책이 많은 책방일수록 나는 오래 그곳을 거닐고, 책과의 대화를 나눈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걷는 시간. 마음이 수다스러워지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마음속의 말수가 많아지는 순간, 정리될 만했던 마음들은 조금씩 가라앉고 끄집어내야 했던 마음들은 도드라지게 되니까.

잠깐 훑어본 책이 보내는 말이 분명할 때면, 다시 서가에 두지 않고 내 손에 다시 꽉 쥔다. 오늘 읽을지도 모르고, 일 년간은 내 책장에서 조용히 지낼지도 모르는 책이지만, 오늘은 이 책을 들고 나가야겠다는 마음만큼은 분명하다. 오전부터 정리되지 않던 업무가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다음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날이지만, 점심시간 산책길에 집어 든 한 권의 책은 오늘 내 마음에 꽂을 만한 유일한 깃발이 된다.

책으로 향했던 사사로운 마음은, 아직은 모르는 어떤 일의 첫 단계인지도 모른다. 어떤 기분으로 책방을 거닐고, 어떤 한 줄로 마음이 일으켜졌는지, 책방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들어차지 않았을 오늘의 마음을 분명히 바라보며 나의 시작을 그린다.

손님의 입장으로 책방 속 사람은 하루를 시작하고, 책을 골라 계산을 한 손님은 그 책으로 다음의 시작을 바란다. 우리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반짝이는 순간들. 비워진 서가에는 또다시 같은 책이, 혹은 다른 책이 자리를 채운다. 책방의 책장이 자주 환기가 되는 장면은, 책을 짓고 책을 채우는 나에게는 더없이 응원이 된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 말이 있어요. 최근에 산 책 혹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최근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으니까요. 책이란 마음이 쓴 작은 엽서를 끼워두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자주 드는 생각, 나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던 걱정거리, 커진 줄도 모르고 외면하던 고민이 때때로 책을 고르는 시선이 되어줍니다. 나의 여러 마음이 골라준 책에 모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면, 작은 엽서 한 장에 적힌 짧은 문장을 만납니다. 떠오른 그 한 문장은 다음을 향할 수 있도록 나의 편이 되어 주지요. 저는 그런 순간을 만나왔기에 여전히 마음이 답답할 때는 책방으로, 또 책으로 향합니다. 가장 최근에 산 책은 무엇인가요? 제목만으로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립니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입니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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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