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되는 종이 3

아무렇지 않은 마음을 아무도 몰래 심어 두었다

아무렇지 않은 마음을 아무도 몰래 심어 두었다

3화 공원

모르지만 아는 길이 있다. 어느 마을에나 있는 작은 공원. 그 시작점에 서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길이, 눈 앞에 나직하게 펼쳐진다.

조금 멀리 산책을 나선 날, 산자락 하나를 발견해 걷다 보니 어느새 둥근 공원에 들어섰다. 오늘은 딱히 목적지도 없었고 공원에 갈 생각도 없었는데도, 우연히 공원을 발견하면 이상하게 도착했다는 기분이 든다. 반가운 마음이 들자마자 공원에 오려던 사람이 되어 공원이 내어 주는 길 위에 차근차근 발을 내디디기 시작한다. 오늘 중 가장 느린 걸음으로.

나는 이런 순간이 꼭 독서를 닮은 것만 같다. 펼친 책의 순간. 책을 읽다가 어느 한 문장에 눈이 머무를 때, 마치 오래도록 기다렸던 문장을 만난 듯이 그대로 가만히 책에 눈을 두고 앉아 있는 순간 말이다. 그런 문장 또한 나에게 도착이라는 기분을 선사한다. 아, 오늘 이 문장을 만나려고 나섰던 거구나, 하고서 책을 펼친 채로 마냥 시간을 보낸다.

몰랐던 공원에 적응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공원의 차림차림을 기꺼이, 즐거이, 혹은 아무렇지 않게 다니면 그만이다. 모르지만 아는 길은 이렇게 생겨난다. 나를 위해 생긴 듯한 다정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제야 공원에서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알아챈다. 사실 그간 이리로 도망 오고 싶었다고, 공원은 가쁘게 숨을 쉬며 살다가 나를 내버려 두는 공간이었다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서서히 알아챈다. 집에도 카페에도 의자와 식물이 있다. 하지만, 거기엔 모르는 길이 없고 언제까지라도 앉아서 올려다볼 하늘이 없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뀌는 계절감이 여기보다 적다. 어쩌면 하나의 마을에서 가장 지구를 닮은 장소가 바로 여기, 공원이 아닐까.

여기다 싶은 벤치를 발견할 때에는 지구를 떠올린다. 둥근 지구 위에 앉은 기분이다. 많은 이가 오랫동안 사용한 듯한 벤치에 앉으면 나는 그제야 작아진다. 실은 원래의 존재감이 이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딱 그만한 크기로 앉아 있다 보면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보다는, 아무도 모르게 마음껏 아무렇지 않게 있는 이 시간을 그저 연장하고 싶어진다. 책을 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괜히 만지지도 않고, 지구라는 둥근 마을에 덜렁 놓인 벤치 하나에 내가 앉아 있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모습으로.

공원에서 지금껏 몰래 간직하던 마음들이 떠오르걸랑 그대로 두자. 나무에 걸리기도, 벤치에 기대기도,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도, 흙바닥에 하나둘 제자리를 찾기도 하는 갖가지 마음들. 벤치에 앉아 있는 나와, 집에서 가져온 집의 물건인 가방 주변에는 두둥실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떠다니는 내 마음들을 보며 무구한 표정을 지을 때면, 나도 모르게 하나둘 없어지거나 잦아드는 것들. 아침까지만 해도 집에서 품고 있던 딱딱한 생각을, 목덜미에 앉아 나를 짓누르던 걱정을, 이 순간만큼은 눙치듯 없던 셈 치고 싶다.

만약 이 순간에 누군가가 나에게 “괜찮아?”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일단은 “괜찮아.” 하고 꾸밈없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잠시지만, 아무렇지 않게 된 이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내 자리에 심었으니까. 집에 돌아가 그저 그렇게 지내다가도 종종 내가 앉아 있던 이 공원을, 공원 흙바닥에 아주 살짝만 닿아 있던 발 자리를 떠올려보면, 당장 필요한 아무렇지 않은 마음이 훤히 내다보이지 않을까.

바람과 나 둘만이 저 나름대로 움직이는 한적한 공원에 책을 든 사람이 들어온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벤치에 앉아 책을 펼치더니 이내 그 자세 그대로 그 어디도 보지 않는 듯이 기대버린다. 그 순간, 공원이라는 문장에는 작은 삽화가 더해진다. 아, 나도 어쩌면 건너편 사람에게는 이 공원 곁에 자리한 판판한 삽화로 보이려나.

건너편의 삽화와 같지만 전혀 다른 공기를 나누며 얼마큼 지났을까. 공원 벤치에 앉고 나서 처음으로 뚜렷한 말풍선이 뜬다. “춥다.” 하고 울리는 이 세상 가장 분명하고 산뜻한 마무리 알림. 공원의 페이지가 서서히 닫히려고 할 때 괜히 바지를 훌훌 털고 일어나 방금까지 앉아 있던 내 자리를 내려다본다. 일어났지만 아직 앉아 있는 내가 보일 때, 그 모습은 오늘의 산책을 표현하는 삽화로 남는다.

이번 차례에는 공원이라는 바깥공기를 가져왔어요. 할 일이 적은 공원이지만, 공원에서의 시간은 긴 시간 선명히 남지 않나요? 공원 산책을 하면 다정한 길을 따라 헤매지 않고 길을 걷게 됩니다. 처음 가는 공원에서도 마치 동네 사람이 된 듯이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걸을 수 있죠. 이 점은 공원을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낯선 마을 속 공원에 가길 좋아하게 된 것도요. 어느 공원이어도 방문 횟수에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녹녹하게 만들지요. 공원 고유의 분위기에 따라 그 마음의 모양 틀이 다를 뿐, 비슷한 강도로 잠잠해집니다. 시간이 지나 내 자리에서 공원들을 떠올리면 제각각의 모양으로 제 마음이 찍혀 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떤 공원에서 어떤 모양을 남겼나요. 가까운 공원보다는 조금 먼 공원에서, 그 모양이 선명하게 찍힙니다. 왜 그럴까요.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아무렇지 않던 마음을 땅속에 꼭꼭 심어두고 싶어요. 언제까지라도 돌이켜볼 수 있게, 다시 이 먼 공원에 도착했을 때 지난 마음을 만날 수 있게. 이제 곧, 공원에서 오래 머물 수 있는 계절이 다시 돌아오겠죠.계절이 지나면 이 세상 공원마다 우리들의 마음들이 잔뜩 심겨 있기를 바랍니다.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립니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입니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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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