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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옷
건지 스웨터
바다의 옷
건지 스웨터
스웨터의 역사는 깊다. 1066년에 노르만 왕조가 건설 된 뒤, 노르만인이 이슬람 수예기술을 배워 영국 해협인 건지 섬에 전파한 것을 시작으로, 노르딕, 아가일, 가디건, 맥시 등 다양한 패턴과 형태로 변화해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털실과 기계가 생겼고, 사람들은 겨울을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11세기로 돌아가, 거칠고 투박한 어부의 옷, ‘건지 스웨터’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내가 쫓은 옷에는 아내들의 염원이 담긴 눈물과 바닷물이 묻어 짠내음이 넘실댔다. 다른 스웨터에는 없는 애틋함이 존재했다. 단지 따뜻함만으로 거친 바다로 향하는 어부를 보호할 수 없었기에, 어부의 아내는 특별한 무늬를 넣고 의미를 수 놓았다.
실로 엮은 갑옷
건지 섬Guernsey Island은 영국해협의 채널제도(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영국령의 섬, 영국령이지만 독자적인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다.)에 속해있는 섬 중 하나다. ‘건지’라는 명칭은 16세기 당시 모毛로 짠 수편(손으로 짠 편성물)에서 유래되었다. 각종 편성물이 번창한 영국 북동부 지방에서 어부들이 입는 짙은 감색의 저지 스웨터를 ‘건지’라고 부르다가, 1960년대 초반부터 ‘피셔맨 스웨터Fisherman Sweater’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조밀하게 꼬인 털실과 철로 된 바늘을 이용해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건지 스웨터는, 바람을 막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 물에 덜 젖을 뿐만 아니라, 30% 수분을 머금은 축축한 공기에서도 어부들을 분리해 주었다. 게다가 새벽에 바다로 나간 남편이 무사히 만선滿船하길 바라는 그들 아내의 기도도 담겨, 스웨터는 더욱 견고해졌다. 높은 파도로부터 남편을 지켜주었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갑옷이 되어, 어부들을 참담한 운명에서 떨어뜨려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은 언제나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불행을 막는 주문의 상징을 믿어 밤에는 절대 실을 감지 않았다고 한다.
건지 스웨터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한 문양에 있다. 집집마다 무늬가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어, 어부의 신원과 출신, 더 나아가 가족의 이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이따금씩 어부들이 바다에서 익사할 경우, 구조하러 간 사람들은 무늬를 보고 멀리서도 신원을 확인했다고 한다. 무늬의 종류는 로프, 어망의 다이아몬드 형태, 청어의 뼈, 배의 닻 등 다양한 편이었고, 그것들은 지역에 따라서 ‘새들의 밤’, ‘고양이의 이빨’, ‘싸락눈’ 등 서정적인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처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시작된 뜨개질은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져, 결국엔 온 마을 사람들이 손뜨개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공급이 늘어나자 어부의 작업복과 외출복으로 한정되었던 건지 스웨터는 점차 영국 해군 수병의 작업복으로 사용되었다. 한 세기가 채워질 때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스웨터 디자인의 기반이 된 것이다.
시대가 어떠한들, 누군가를 위한 뜨개질이 따뜻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웨터는 이제 ‘겨울의 옷’이 되었고, 어감만으로도 마시멜로 위에 앉은 듯한 포근한 느낌이기에 건지 스웨터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차가운 것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두텁고 거친 실로 만들어진 스웨터를 입고 바다로 향하는 어부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에. 겨울바다의 한기가 한껏 스며든 것 같았다.
요즘의 잣대로 보자면 건지 스웨터는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좋은 소재, 다양한 기능성이 있는 옷이 아니니까. 그러나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직접 짠 스웨터를 선물하는 것에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엉성한 모습일지라도, 그걸 입게 되는 사람의 가슴 가까이에는 ‘진심’이 맞닿아 있을 것이다. 아내가 만든 건지 스웨터를 입은 그날의 어부들처럼.
에디터 이혜인
일러스트레이터 곽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