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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멈춰 바라본 작품에 대하여
미술관에 갔다
우리는 멈췄다
미술관 안에는 바깥과 다른 공기가 흐른다.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선을 그리며 다니고, 어떤 작품 앞에서는 잠시 멈춰 선다. 멈췄던 자리에는 고요한 뒷모습이 남아 공기를 덥힌다. 어떤 종류의 고뇌, 어떤 종류의 머뭇거림, 어떤 종류의 뒷모습, 어쩌면 작품에도 선물이 될 풍경을 이야기한다.
01 ‘untitle’
02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03 국제 갤러리KUKJE GALLERY, 서울
미수아바흐브 디자이너 김미수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후 전시를 볼 기회도 의욕도 줄었다. 감동을 받는 일이 드물었던 때, 아니쉬 카푸어의 신작 전시를 보았다. 실버 컬러의 오브제들이 줄지어 설치된 모습에 새로운 감동이 일었다. 그녀의 작업이 갤러리의 분위기와 공기를 만들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만드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전의 작업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과 일치되는 경험이었다.
01 ‘Standing Julian’, 2015
02 어서 피셔Urs Fischer
03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뉴욕
프리랜스 번역가 김나연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피부가 새까맣게 탈 만큼 볕이 뜨거워야 기분이 좋아진다. 휘트니미술관에 간 날, 3일째 잠을 설치고 우울해서 뙤약볕에 정신을 소독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코니에 올라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를 구경했다. 한참 있다 내려와 전시장으로 향하는 통유리 문을 열었더니 이 조각이 서 있었다. 족히 2미터는 넘을 법한 중년 남성 조각상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머리가 반쯤 녹은 대형 초였다. 오른쪽 귓바퀴 옆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일렁이는 촛불이 보였다. 미술관 개장 시간에 심지에 불을 붙이고 폐장 시간에 불을 꺼, 전시가 열리는 동안 서서히 형태가 사라지는 작품이다. 피할 수 없는 삶의 비영속성을 표현했다는데, 어차피 잠도 자지 못할 거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서로의 불타는 일생을 오롯이 지켜봐 주면 좋겠다 싶었다.
01 ‘Pelvis Series’
02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03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런던
《여행자의 미술관》 저자 박준
분홍색 대지에 창백한 달이 떠있다. 보라색 산등성이를 지나자 라벤더 컬러의 하늘과 새하얀 눈밭이 펼쳐졌다. 노란 절벽 밑을 거닐다 문득 푸른색 구멍 (hole)과 마주쳤다. 조지아 오키프가 뉴멕시코 산타페에 살 때 그린 동물의 골반뼈 구멍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구멍이 푸른 게 아니라 하얀 골반뼈 구멍 저편의 하늘이 푸르다. 눈물겨우리만치 푸르고 깊다. 뉴멕시코에, 산타페에 더욱 가고 싶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의 햇살과 바람은 아주 특별하리라. 지난가을, 런던의 하늘은 파란 물감처럼 한 점 티 없는데 나는 자꾸 푸른색 죽음이 떠올랐다.
01 ‘달밤의 화실’
02 김환기
03 환기미술관Whanki Museum, 서울
화가 조안빈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부암동 오르막을 오르기도 여러 번, 전시에 이 그림이 없을 땐 아트숍 2층에 올라가 그림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된 ‘달밤의 화실’을 가만히 바라보다 오기도 했다. 왜 좋으냐고 하면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끌었고 실은 ‘좋아서’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지만. 김환기가 50년대 파리 시절 그렸다는 ‘달밤의 화실’ 속 푸른 달과 항아리, 그리고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보면 나는 애틋해져 이내 푸른 달빛이 어린 화실 창밖의 그리운 하늘을 향해 하얀 입김을 내뿜는 타국의 화가가 되곤 한다. 환기의 푸른 달은 내 그리운 달과 닮았다.
01 ‘Normal life’
02 heesookim
03 이태원 어느 부동산 2층의 전시장, 서울
영상 감독 이와
유난히 추웠던 2016년 겨울.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갔다. 전시 장소 중 수많은 스케치를 모아놓은 방이 있었다.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 표현이 좋을 것 같다. 한 장의 그림이 아닌 수백, 수천 장의 스케치와 메모로 만들어진 방 안에서 한 장 한 장 천천히 때로는 깊숙이 그림을 바라보며 작가와 나는 서로 동질감을 느꼈다. 그곳의 모든 것들이 다 내 일상 같았다.
01 ‘책 읽는 여자’
02 함미나
03 달조각, 서울
에디터 오혜진
작은 카페였어요. 곳곳에 쌓인 재즈 음반과 책들 사이로 몸을 욱여넣고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죠. 무대미술을 전공한 주인의 작업실이기도 한 공간에는 그림들이 주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좋았어요. 천천히 구경하다가 책을 읽는 여인에게 시선이 멈췄어요. 그림 속 그녀도 나처럼 시름을 잊기 위해 독서를 택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가끔 힘들 때 ‘우리의 본질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이라는 말에서 위안을 얻곤 했는데, 그림을 보며 생각했어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내리는 매일의 습관처럼, 빈틈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에디터 이현아
글 김미수, 김나연, 박준, 조안빈, 이와, 오혜진 일러스트 강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