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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뭍으로 나온 서림
교보문고
책으로 엮인 비밀의 숲이 하나 있었다. 이야기는 땅 밑으로 뿌리를 내렸고, 곧 몸통 굵은 나무로 자랐다. 몇 계절을 더 보내고 난 뒤에 크고 작은 책이 주렁주렁 열리고 지면서, 다양한 나무들로 수풀은 우거졌다. 비밀스럽게 몸체를 키워가던 숲은 어느덧 사람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뭍으로 나온 서림書林이 조금씩 인간의 삶에 가까워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숲에 이름을 지었고, 우리는 그것을 ‘교보문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시작된다
이건 책과 함께 사는 삶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전남 영암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대산大山 신용호 선생은 어린 시절 병마와 싸우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는 이런 갈증을 독서로 달랬는데, 책을 읽으며 홀로 사유하는 법을 익히고 너른 배움을 독학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1000일 동안 독서를 이어갔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스무 살이 된 신용호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사업을 이어가면서 민족기업가의 꿈을 키웠다. 일제에 핍박당한 아버지와 형을 보며 힘없는 민족의 설움을 피부로 느끼고, 강한 자생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해방 이듬해 빈손으로 귀국하면서도 이 시절의 경험은 그의 귀중한 바탕이 되었다.
경험과 꾸준한 독서로 자기만의 신념을 굳건히 한 그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믿음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 그렇게 교육보험 사업을 결심하고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했으며, 1958년에는 대한교육보험을 창업했다. 물론 새로운 보험회사 인가를 꺼리는 정부 당국의 방침 때문에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신용호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당시 재무부장관 집 앞에서 반년을 기다린 끝에 그를 직접 만나 설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대한교육보험’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보생명을 창립한 것은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인적자원을 키워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자립의 기반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보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교육과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고 싶습니다.”
책을 통해 지혜를 깨친 그는 책은 스승이자 인생의 나침반이라고 여겼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신념은 곧 교보문고의 설립 이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 교보생명 빌딩 완공을 앞두고 지하 공간에 대한 임대 문의가 쇄도할 때, 어떤 사업을 시작하게 될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하지만 신용호 선생은 임대 수익을 마다하고, 누구나 책을 마주할 수 있는 서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주변의 반대 의견을 자신의 굳건한 신념으로 설득하며 결국 문을 열었다. 그때, 교보문고의 모습은 말 그대로 ‘책의 천국’이었다.
책이 모두에게
공평하도록
처음 문을 연 교보문고는 서가 길이만 24.7킬로미터에 달했다. 개장과 동시에 명소가 되었고, 그의 소망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향한 문턱을 낮추었다. 지식과 문화의 광장, 사람들의 의견이 오가는 공간, 그리고 책과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아지트가 된 것이다. 교보문고 설립을 준비하던 신용호 선생이 말했다.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이곳에 청소년들이 와서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들이 커서 훌륭한 작가나 대학교수가 되고 노벨상을 타고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얼마나 보람 있는 사업입니까?”
책을 보는 데에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도록, 모두가 공평하게 책 안의 세상을 유영할 수 있도록 모든 서가에 책을 빽빽이, 그리고 자유롭게 올려두었다. 당시에 외서는 더욱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어서, 외서를 통해 선진 출판물을 보고 익히라는 의미로 더욱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책과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사람들을 서점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오래 머물기 위한 매력적인 공간을 고안하기도 했다. 지금의 교보문고가 바닥에서, 작은 벤치에서, 널찍한 테이블 위에서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한 이유기도 하다. 실제로 처음 교보문고의 5대 영업지침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독서가를 배려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 모든 고객에게 친절하고 초등학생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
2. 책을 한곳에 오래 서서 읽는 것을 말리지 말 것
3. 책을 보기만 하고 사지 않더라도 눈치 주지 말 것
4. 책을 앉아서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5. 책을 훔쳐 가더라도 도둑 취급하며 망신주지 말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해결할 것
*저자의 저작권 문제로, 도서 내부 사진 촬영은 자제되어야 합니다
고여있지 않게
앞으로 흘러
나아가게
“생존과 발전의 원리는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새로워지지 못하고 옛것에 안주하게 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한 그의 말에 따라 교보문고는 지속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맞춰,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보문고 내부의 문제만을 주시하는 게 아니라 독서와 출판과 관련된 시장 전체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독서 문화와 친해지려면 책 읽는 공간이 사람들 눈에 계속 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6년 1월 신도림역에는 교보문고의 ‘바로드림 센터’가 만들어졌다. 시범적으로 시작된 ‘바로드림 센터’ 사업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하고 바로드림 센터에서 책만 받아 가면 되는 서비스다. 서점에서 책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이 더욱 쉽고 간편해지면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무엇보다 어떤 지점에 새로운 서점이 안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독서 가능 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했다. 길을 가다 문득,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문득, 누군가의 생일이 생각나서 문득, 사람들이 서점을 찾을 수많은 이유가 다시금 환기되는 순간이었다.
온라인 서점 서비스를 시작했던 지점도 비슷했다. 1997년, ‘인터넷교보문고’를 처음 열면서 사람들이 서점이라는 공간을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책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책의 접근성을 높였다. 네트워크 연결망 이용도가 활발해지고 전자기기의 보급률이 올라갈수록 외면할 수 없는 변화였다. 물론 어느 누군가는 온라인 서점을 보면서 “더 이상 사람들이 서점을 찾지 않을 것이다”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과 사람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이 서점의 의미라면,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전자책의 등장으로 서점과 출판물에 관한 위험성이 제기되었다. CD에 책 내용이 담겼을 때도, 같은 논의는 이어졌다. 종이책은 정말 종말할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전자책은 종이책의 대체품이 아니라, 함께 병행할 수 있는 대상이다. 종이책을 읽을 수 없는 혹은 읽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전자책이 그에 걸맞은 서비스나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고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비싼 값을 들이지 않고 국내 책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로움을 어떻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면서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셈이다.
책이 있는
숲으로 와요
사람들이 책을 마치 ‘매니악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걱정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만 책을 읽는 것처럼, 책을 하나의 기호 활동으로 여기는 듯이 느껴진다는 이야기였다. 책과 멀어지면서 은연중에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속으로 곱씹었다. 먼저 SNS나 TV, 인터넷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 아마 그런 것이 책이 차마 달래주지 못한 무엇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꼭 이 대화로 설명을 해야 한다.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나는 ‘불쌍하다’는 말이 무작정 싫은 사람이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빠가 이어 말했다. “측은지심을 떠올려 봐.” 둘째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측은지심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은 건 아닌가 생각했다. 싱클레어가 되어 데미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점순이가 되어 괜한 투정을 부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혹은 앞으로도 어쩌면 경험할 수 없을 일들을 가늠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관심’과 ‘가늠해본 적 있음’은 엄연히 다른 맥락의 이야기니까. 그러니 우리는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이곳에서 크고 작은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누군가의 배경을 이해하고 연민하면서, 가장 인간다운 마음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러 생각을 고이 담은 책들이 모여 사람들의 곁으로, 수면 위로 둥근 얼굴을 내민 것은 교보서점의 한 켠이었다.
에디터 이자연
자료 제공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