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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펜, 나의 기록
박윤혜ㅣ28세, 서울과학기술대 교직원ㅣFABER-CASTELL 2½ HB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투박하고 큰 손, 거친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과 뭉툭한 손톱.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직접 연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기타를 안아본 적이 없었고 기타가나에게 안길 준비가 됐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우리 집 소파 옆 작은 틈에 쪼그리고 앉은 기타가 생각났을 뿐. 무작정 아무 종이나 아무 연필을 집어 그림을 그렸다. 여섯 줄을 긋고 내가 기억하기 좋은 손가락 번호를 적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어쩌면 아무도 몰랐던 기타 신동일지도 몰라!’
나는 리듬감이 거의 없었고, 악보 해독능력과 코드 암기력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기타를 품고 튕기고 두드리고 누르고 보기 어려운 악보를 그려서 무작정 외우고 있다. 왜냐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기타 신동일지도 모르니까.
전진우ㅣ29세, 에디터ㅣKOH-I-Noor versatil 5211
메모와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지만, 이 펜에 관련된 신기한 일이 있었다. 예전에 M방송사에서 ‘소설가 김훈이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여행한다’는 식의 기획으로 제작된 TV프로그램을 본 적 있는데, 3부작 중 내가 본 건 그가 독일을 여행하는 편이었다. 그는 한가한 길거리 상점에서 기웃거리다가 내가 가진 것과 똑같은 펜(그가 고른 건 빨간색이었다)을 발견하고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일행이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대꾸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계속 웃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길게 담아내준 게 좋게 다가와, 나머지 프랑스편과 체코편도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는 원고지 위에 소설을 쓴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그처럼 이 펜으로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종종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걸 손위에서 빙글 돌리며 그 웃음을 생각하곤 한다.
김원우ㅣ7세, 청룡보듬이나눔어린이집 한빛반ㅣTiTi oil-pastel
선생님 원우는 고래를 왜 그렸어요?
원우 좋아서요.
선생님 고래가?
원우 네.
선생님 고래가 왜 좋아요?
원우 고래를 탈 수 있으니까요. 분수가 나오면 재미있어요.
선생님 원우는 고래를 언제 타봤는데요?
원우 그냥 지금 생각한 건데요.
선생님 타보지 않았는데 좋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원우 7살이면 그 정도는 알아요.
곽명주ㅣ25세, 일러스트레이터ㅣSTAEDTLER pigment liner 0.1
새해의 시작은 ‘새 다이어리의 가장 첫장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 있다. 새 노트의 첫번째 페이지에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볼펜의 미세한 굵기, 새어나오는 잉크의 양과 질감, 번지는 정도 등을 바탕으로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다. 2013년 1월 1일, 스테들러 당첨. 볼펜심이 비교적 빨리 닳기 때문에 꼭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나 중요한 편지를 쓸 때만 사용하게 된다. 너무 누르지 않아도 잘 나오니 손에 긴장을 풀고 사용할 것.
고정연ㅣ26, 『Yona’s Kitchen』의 저자ㅣPRISMACOLOR Colore d Pencil
어릴 적부터 모든 색이 좋았다. 특히 화방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종이와 색연필 세트를 손에 넣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지금도 책상 위엔 고등학교 때 선물 받은 120색 세트의 ‘프리즈마컬러 색연필’이 가득 꽂혀 있다. 노트에 나만의 레시피를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나갈 때면 어느새 숨을 멈춘채 색연필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사진 속 메모에서, 왼쪽은 달콤한 쿠키나 타르트에 어울리는 슈크레 반죽, 오른쪽은 담백한 키슈에 어울리는 브리제 반죽에 관한 내용이다.
권덕기ㅣ58, 경북대 교수ㅣMoNAMi Mp-105
예전부터 아빠의 차 안에는 메모지와 샤프펜슬이 항상 있었다. 매번 기름을 넣을 때마다 그걸로 뭔가 기록하는데,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연비가 급격히 떨어지면 폐차시켜야 하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기록을 해두는 것’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빼곡한 글자를 보면 남다른 기록인 것은 분명한데, 왜 꼭 이 펜을 쓰냐고 물었더니 ‘뭐 그냥 옆에 있는 거 아무거나’라고 말했다.
*아빠의 펜과 메모지를 딸이 설명하다.
니나안ㅣ34세, 포토그래퍼ㅣ사슴모양의 펜
현재 진행되는 것은 보여줄 수 없기에 2012년의 메모를 보여드립니다. 펜 이름도 말해야 하나요? 2012년 1월 일본 나라현의 사슴공원에서 샀어요. 제가 기념품 판매점 앞에서 계속 얼쩡거리다가 포기하고 돌아섰는데(볼펜치고 좀 비쌌는데 사슴 귀부분에 반해서 수없이 고민), 톰(남자친구)이 나 몰래 사서 교토 집으로 돌아갈 때 저한테 주더라고요. 이름은 잘 몰라요. 보면 알겠지만, 저의 수준이 여실히 드러나는 펜입니다. 하하. 그럼 일요일 저녁에 카페 ‘히비’에서 찾아가시길. 잃어버리면 안돼요!
심효정ㅣ19, 성지여자고등학교 3학년ㅣSigNo UM-151 0.38
첫번째 사진은 야자시간 도중에 친구한테 편지 써서 보냈더니 답장으로 온 거예요. 야간자율학습시간의 묘미라고나 할까. 두번째 메모는 친구랑 장난쳤던 낙선데요, 지금 유행하는 건 아니고 중학교 때 하던 게 생각나서 써봤어요. 전부 시그노 펜으로 적은 거예요. 일제라서 한동안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저만한 펜을 아직 못 찾았어요. 필기할 때 최고! 음, 근데 가격이 조금 비싸요.
정유진ㅣ28세, 그래픽디자이너ㅣLAMY SAFARY BLACK
내가 좋아하는 펜은 라미LAMY 무광 사파리고, 이유는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한테 선물 받은 펜이기 때문이야. 얼마 전에 또다른 선배가 라미에 딱맞는 나무 만년필꽂이를 직접 만들어줘서, 이 펜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됐어. 그리고 영어로 쓴 저 글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문구야. 학교 다닐 때 전공이 적성에 잘 맞지 않아 좀 겉돌았고, 남들 만큼 수업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늘 자신이 없었는데, 그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국문과 교수님이 해줬던 말이야. “개성은 비교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원래는 영어로 된 문장이었고,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한 말이었어. 그 뒤로 다이어리의 첫장이나 펜을 새로 쓸 때 그냥 습관처럼 이 문장을 적을 때가 많아. 짧아서 외우기도 좋고, 저 문구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싶을 때가 있으니까.
김이경ㅣ31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ㅣ타이항공 승무원이 준 펜
특별한 사람들의 대단한 이야기에 질려하던 즈음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에서는 좀더 소소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잠시나마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 생각으로 짐도 가볍게 꾸렸다. 실수로 필통까지 두고올 정도였다. 비행 중에 생각나, ‘도착하면 저렴한 펜을 하나 사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콕에 도착할 때쯤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승무원에게 부탁하니 타이항공의 로고가 박힌 볼펜을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외형에, 가볍고 필기감도 좋아 기꺼이 이번 여행에 함께할 물건으로 여기게 되었다. 식당에서 주문서를 작성하거나 마음에 드는 가게의 홈페이지 주소를 적을 때면 이 보라색 타이항공 볼펜을 썼다. 시간이지날수록 펜은 종이와 밀착되면서 필기감이 좋아졌다. 치앙마이를 구경하던 중 여러작가가 모여 각자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가게에 들리게 됐는데, 그 가게의 주인은 자신의 페이스북 주소를 종이봉투에 남겨주었다.
전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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