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기억과 나만의 위안

유상경 — 뭍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프렌치토스트를 해 먹는 시간. 스스로 차린 작은 식사는 오래전 다정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숲이 보이는 창문, 고즈넉한 나무 가구들, 푸릇푸릇한 식물이 가득한 집. 온정이 담긴 공간을 채우며 사는 이의 일상은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먹고사는 고민으로 가득한 우리를 위한 물음과 고요한 위안을 찾아 주는 답장이 이어진다.

소개로 시작할까요? 

안녕하세요. 화장품 회사에서 마케팅을 하다가 퇴사 후 식물 숍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유상경입니다. 서촌의 오래된 연립을 숲 속 오두막처럼 꾸며 살고 있어요.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들, 그래서 편안함을 주는 것들을 좋아해요. 

 

최근에 ‘잠을 잘 자기 위해 떠난 도보 여행’을 했다고 들었어요. 

겉으론 제 일을 잘 준비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별안간 두려움과 무기력, 허무함이 찾아왔어요. 일상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면서 잠이 들고 깨는 시간도 대중이 없어진 거죠. 정확히 짚어낼 수 없는 여러 불안이 뒤섞여 잠에 들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 돌아와야 하는 일정을 계산해보니 하루 40킬로미터씩 양평에서부터 걷기 시작하면 4박 5일 동안 강릉까지 총 170킬로미터를 갈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35도를 오가는 폭염주의보가 울렸지만 별수 있나 하는 마음으로 바로 배낭을 꾸려 출발했어요. 

 

힘들었겠네요. 잘 챙겨 먹긴 했나요? 자고로 여행은 음식인데(웃음). 

90퍼센트에 달하는 습도 속에서 땡볕으로 달궈진 길을 걸을수록 몸은 지쳐가는데 신기하게도 정신은 또렷해지고 감각은 단순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산길이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간 했던 고민이 불필요한 껍데기를 벗은 느낌이었어요. 밥을 먹을 때도 생경한 경험을 했어요. 퇴사한 이후로 혼자 밥 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주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무얼 먹는지도 모르면서 음식을 넘겼거든요. 여행을 가서는 몸이 너무 힘들다 보니 밥을 먹으며 스마트폰을 볼 힘이 없는 거예요(웃음). 어쩔 수 없이 먹는 일에만 집중했는데, 무언가를 씹고 맛을 느끼는 감각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어요. 더 맛있게 느껴지기보다는 제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이 더 선명하게 의식되는 경험이었어요. 

 

새로운 경험이었네요. 상경 씨는 자취를 오래 했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식사를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아졌을 것 같아요. 

된장찌개, 제육덮밥 같은 생존형 요리는 꾸준히 했지만, 요리에 재미를 붙이게 된 건 호주에 1년 동안 살았을 때부터였어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지냈는데 친구들에게 집에서 가장 자주 먹는 가정식을 하나씩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마르코Marco라는 이탈리아 친구에게 까르보나라를 배웠는데, 한국에서 소개팅할 때 먹곤 했던 크림 까르보나라랑은 완전 다른 맛이었어요. 크림 없이 계란만 넣으니 너무 고소하고 맛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호주에서 제 주식은 까르보나라가 되었어요. 정작 까르보나라를 가르쳐 준 마르코는 신라면에 빠져서 저는 까르보나라를, 친구는 신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러니한 장면이(웃음). 일요일이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해 주셨던 프렌치토스트를 해 먹는 게 즐거움이기도 해요. 대단한 레시피는 아니지만, 계란이 우유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가는, 꾸덕꾸덕하고 고소한 프렌치토스트예요. 일요일 늦게 일어나 프렌치토스트를 해 먹으면 아무것도 걱정 없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기분이에요. 이야기하다 보니 저에게 음식은 기억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 무언가를 먹을 때 맛보다는 주로 향을 기억하기도 하거든요. 프렌치토스트가 구워지기 전의 버터 향은 제 어린 시절을, 까르보나라를 만들 때 양파가 익으면서 나는 달달한 향은 호주에 살았던 때, 똠얌꿍의 스파이시한 향은 필리핀에서 프리다이빙 강사로 지냈을 때의 기억을 불러일으켜요. 그래서 어떤 시기가 그리워질 때면 당시에 즐겨 먹던 요리를 해 먹고 있어요.

상경 씨 공간은 취향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이런 집에서라면 어떤 걸 먹어도 즐거울 것 같아요. 

이 집과 만나서 취향으로 채우는 동안 우연이 많았어요. 도시와 시골의 매력이 뒤섞인 서촌이라는 동네에 들르게 됐고 인왕산을 보게 되었고, 숲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집을 찾게 되었죠. 생각해보면 공간을 꾸미고부터 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됐어요. 레이스 커튼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가장 재밌는 발견이었죠. 

 

식물도 참 많네요. 거의 식물의 집 같기도 해요(웃음). 

집들이 선물이 식물 키우기의 시작이었지만 지금은 약 서른 개 정도를 키우고 있어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죠. 쉴 시간이 없어요. 물 조리개 종류만 네 가지예요. 친구가 집에 놀러 와도 갑자기 일어나서 식물에 물을 주러 가기도 하는 다소 유난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이 되었어요(웃음). 식물은 부담 없이 안부를 물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저와 함께 계절을 보내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어요. 뿌리를 내리고 새순을 틔우고 꽃도 피우고. 혹은 물이 부족하면 잎을 축 늘어트리면서요. 식물이 혼자서 열심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래 너도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왠지 위안을 받게 돼요. 이리저리 곡을 만들어가며 올라가는 줄기와 세월이 남긴 상처를 보면 그 나무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이 느껴져요. 서울은 참 빠르게 변하고 매일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데, 나무에 담긴 묵직한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리고 고요한 위안이 돼요. 

 

고민이 생길 때 식물이 큰 위안이 되겠네요. 

그렇죠. 특히 요즘 더 힘을 많이 받고 있어요. 식물 숍 오픈을 앞두고 제가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운영해야 할까. 고민이 많거든요. 지금 고민의 화두는 ‘먹고사는 일’이 되었어요. 비즈니스,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냉정하고 전략적인 태도로만 접근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과연 그렇게만 접근하지 않고서도 지속될 수 있는 먹고사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요. 물론 저도 마케팅을 했던 사람으로서 치열하게 생존 전략을 고민 중이지만 그보다 저에게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림은 제 공간에 손님이 와서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경험하고 나갈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거든요. 그 마음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찾고 있고요. 이렇게 말하면 주변에 사업을 하는 지인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뜬구름 한 번 잡아보려고 퇴사한 것이니 용기 있게 시도해보고 싶어요. 

 

이럴 때는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무언가를 찾는 게 중요하죠. 

다소 집착적인 성격이 있어서 무언가에 꽂히면 계속 그 생각만 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래서 지칠 때면 집 근처에 있는 수성동 계곡으로 산책하러 나가요. 정말 다양한 풀과 나무류들이 자라고 있어요. 봄이면 바위틈에서 흰색 조그마한 돌단풍 꽃이 피고 여름이면 제가 좋아하는 자귀나무에 우아한 연분홍 꽃이 달려요. 비가 내릴 때면 조그마한 폭포에서 계곡물이 흐르기도 해요. 계곡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음이 너그러워져요. 망하면 그때의 길이 또 있겠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잘하지 못하면 뭐, 별수 있나. 거기까지가 내 실력이겠지. 하는 다소 통달한 사람 같은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곳이에요.

‘뭍’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오브제 브랜드도 함께 운영하고 있잖아요. 바쁘게 지내고 있네요. 

퇴사를 하고 제가 좋아하는 인센스와 관련한 작은 브랜드를 운영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식물 숍을 오픈하기에 앞서 실질적인 판매 경험을 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던 중 팔로산토라고 저희 집에도 있던 천연 인센스가 눈에 들어왔어요. 좋은 수입처를 찾기만 해도 꽤 의미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었고, 작게 편집숍을 운영해보기에 적합한 아이템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래에는 식물 숍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새로운 것을 못 하고 있지만, 꾸준히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숍을 오픈하면 인센스뿐 아니라 가드닝과 관련한 여러 소소한 아이템들을 함께 업데이트해서 제가 좋아하는 라이프스타일과 관련한 온라인 채널로 활용 생각이에요. 

 

식물 숍 공간은 어떻게 채워질지 궁금해요. 

‘집의 흔적’이 묻어나도록 꾸며볼 생각이에요. 어쩌면 제2의 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그곳엔 실제 손님들이 오갈 테니 대접을 위해 차와 커피 같은 음료류를 공부해 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리라고 하기엔 약소하겠지만 허브류들을 따로 키우는 공간을 마련해 그것들로 직접 차를 내어드리는 것도 저의 소박한 바람 중 하나예요. 요즘은 숍을 차리고 난 후의 장면을 상상해보는 재미로 살아요. 햇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창가에서 식물을 만지고 있고, 한쪽엔 손님이 천천한 걸음으로 느린 호흡의 음악과 함께 식물들을 구경하고 있어요. 때론 식물 이름을 묻기도 할 테고, 특성을 묻기도 하겠죠. 혹은 아무 말도 없이 식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거나 선물을 주려는 사람의 취향을 떠올려보고 있을 수도 있겠죠. 이렇게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빠르게 돌아가던 바깥과 다른 시간을 잠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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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

사진 유상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