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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All Around
고작 45일간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새학기를 맞은 학생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공식적으로 네 번째 연애를 마친 어느 날이었다. 먼저 실패한 관계들을 떠올렸다. 관계에도 생명이 있다는데 내가 맺는 관계는 언제나 빠르게 타올랐다가 꾸준히 식어갔다. 내 안에서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서 무조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사랑은 가장 오래된 주제이자, 가장 보편적인 주제였고, 당시 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했으니까. 여행의 시작은 런던이었다. 보름 동안 머물렀던 이곳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침에 일어나 미술관에 가는 것뿐이었다. 박물관 로비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귀엽게 생긴 동양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는 카즈오라고 해. 10일 동안 런던에서 여행 중인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혹시 도와줄 수 있니?” 나와 같은 목적으로 온 아이였다. 일명 ‘스마일 프로젝트Smile Project’ 중이라는 카즈오는 내게 언제 웃음이 나는지 물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사랑할 때 웃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며 되묻는 내게 ‘사랑은 웃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고마워, 카즈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건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런던에서는 용기의 문제였고, 파리에서부터 이 무모한 도전이 조금씩 즐거워지고 있었는데, 독일어를 쓰는 도시로 가면서 언어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안녕, 나는 한국의 대학생인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도와줄 수 있니?”로 충분했던 문장에 혹시 영어할 줄 알아?”를 추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를 떠나 내가 키 작고 동글동글한 여자애라는 건 굉장한 장점이었다. 어린아이 숙제 봐주듯 모두가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다만, 사랑에 대한 생각만큼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1 나니Nani (대학생, 오스트리아 빈)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끌려온 미하엘 광장. 그곳에서 만난 나니는 여느 때의 나처럼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날로그 카메라를 쓰고 있어서 서로 무척이나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광장 바로 앞에 있는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있다고. 휴일인데 학교에 나와야 했던 그녀는 짜증을 냈고 나는 웃음이 났다. 다들 똑같구나.
#2 빌리더키드Billy the Kid (상인, 이탈리아 로마)
이탈리아 남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어찌나 여자에게 친절한지. 스페인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매일 이곳에서 그림을 팔고 있다고 말했다. 로마가 좋은 이유가 그저 사람이 많아서라니, 그와의 서툰 대화.
“영어 할 줄 알아요?”
“그럼, 그럼!”
“나는 한국 대학생이고,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럼, 그럼!”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너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모두를 사랑하지.”
“당신이 생각하기에, 사랑은, 무엇인가요?”
“나는 모두를 사랑하는데?”
“오케이. 한번 적어줄래요?”
“그럼, 그럼!”
사실 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리고 이름 대신 밝힌 Billy the Kid는 뉴욕 출생으로 21년의 짧은 생애 동안 21명의 사람을 살해한 미국의 유명한 범죄자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이럴 수가!
#3 패트릭Patrick.J (포토그래퍼, 프랑스 파리)
‘나는 다르다’는 말은 전 세계 공통어라도 되나 보다. 소매치기를 만날까 봐 지하철에서 경계를 풀지 못하던 내게 소매치기처럼 말을 걸어오던 패트릭. 그리스에서 온 이 남자는 나이 많은 오빠처럼 나를 훈계하더니 가방에 있던 병맥주를 선물로 주고 내렸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하지만 패트릭 덕분에 여행 중에 누구를 만나도 경계하는 대신 먼저 웃어줄 수 있게 됐다.
“몸 조심해. 되도록이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낯선 사람과는 절대 말 섞지 마.”
“너도 낯선 사람이잖아.”
“당연히 나는 빼고!”
#4 존Will St.John (미대생, 프랑스 파리)
모두가 ‘모나리자’ 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한구석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남자. 미술전공자들과 유럽권 학생비자가 있는 사람에게 파리 시내는 아주 너그러운 작업 공간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무료이기 때문. 존은 파리에 살고 있는 미술학도라고 했다. 방해하기 싫어서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잠깐 쉬는 틈을 타 옆으로 갔다.
“너무 멋지다!”
“고마워.”
“학생이야?”
“응, 너는?”
“나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프로젝트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물론이지, 뭔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1초도 망설이지 않고)Titien.”
“응?”
“이 그림(내가 노트에 그린 하트 그림을 가르키며),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5 에바Eva (시계탑 직원, 체스키 부데요비체)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체스키 크롬로프Cesky Kromlov에 가려면 체스키 부데요비체Ceske Budejovice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이 ‘그 체스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무작정 ‘체스키’라고 써 있는 열차에 올랐다. 검색 한 번이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게으른 여행자는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뭔지도 정확히 몰랐으므로, ‘아 여기가 체스키구나. 생각보다 사람이 별로 없네’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시계탑에 올라가 장난감 같은 건물들을 그리고 있는데 에바를 만났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곳은 체스키(크롬로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프로젝트나 하자!’
“에바,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사랑? 어렵다….”
“네가 생각하는 걸 그냥 적어보면 돼.”
“그럼 내려가서 나중에 봐. 쑥스러워.”
“응 그럴게!”
그녀가 적은 사랑 노트에는 체코어가 가득해서 중간에 몰래 봤어도 전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6 카밀Camille (화가, 프랑스 파리)
상상 속의 몽마르트 언덕은 푸른 잔디와 낭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둘기 배설물과 장사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피해 지나가는데 인상 좋은 화가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너를 그리고 싶어. 머리띠가 마음에 들거든. 원한다면 반값에 그릴게. 만약 네가 내 그림을 원한다면 말이야. 네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면 나도 괜찮다. 하지만 내 그림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뻔한 상술인 걸 알지만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을 주겠다는데, 기꺼이. 그림이 완성되고 나는 그의 말처럼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았다. 아주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와의 대화가 그저 즐겁기만 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그런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랑은 빠지는 것!”
#7 차오Qiao (네덜란드 유학생, 중국)
출국을 이틀 남기고 암스테르담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끝자락에 열차의 간이침대까지 고장 나는 바람에 많이 지쳐 있었다. 한 살 어린 중국 여자아이 차오는 그런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그녀는 저녁을 같이 먹자며 동네로 나를 초대했다. 괜찮은 맛집이 있는가보다 싶어 숙소에 짐을 두고 찾아간 주소는 다름아닌 그녀의 집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밥 못 먹었지?’라며 뜨끈한 밥에 국, 고기 찜 요리를 내어놓는 차오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만에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것처럼 수다를 떨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바람은 찬데 마음이 따뜻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그녀가 적어놓은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은 사람을 강하고 용감하게 만들어. 상처 따위는 잊고 삶을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해주거든.”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이 길어질수록 공유할 수 없는 시간도 늘어갔다. 두드리던 자판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여행Travel이라는 단어는 2천년 전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죄인을 묶어두고 햇빛에 말려 죽이는 고문기구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가끔은 고문처럼 힘든 게 여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온갖 나의 모습들이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나와 기어코 마주하고야 만다. 그럼에도 자꾸 떠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여행을 왔다가 로마에 정착해버린 아저씨는 모두 비우고 가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연을 가지고 떠나온다고. 대포 같은 카메라에 많은 걸 담는 대신 스쳐가는 시간에 가지고 온 것들을 비워내면 돌아가서 새로운 걸 담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한다는 아말피 해안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 무거운 눈꺼풀만 껌벅거렸다. 도망 같은 여행이라고 고백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떠나오지 못했다. 모든 게 그립지만 어디에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들만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게 홀로 사랑을 찾아 떠났다가 돌아온 지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커다란 나무같이 한결 같았던 할아버지를 잃었고, 꽃처럼 연약해진 할머니 곁을 지켰으며,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다. 물론 아픈 일만 있던 건 아니다. 너무 예뻐서 잠이 오지 않는 이층집으로 이사했고, 기특하게도 시집보다 어렵다는 취직을 해 이름 석자가 적힌 잡지가 여섯 권 나왔으며, 멋진 남자친구도 생겼다. 여행 같은 건 기억 어딘가에 묻어둘 만큼 많은 일이 있었지만, 밀린 일기를 쓰듯 꼭 한번은 꺼내보고 싶었다. 떠난 지 866일 만에 펼친 기억들에 나는 설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관광지 대신 사람을 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우연한 일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난 이상한 여행이었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 다르고, 그래서 참 예뻤다. 지금도 러브 프로젝트는 느리게 진행 중이다. 또렷한 정신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아 술 한잔에 기대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에 관해 묻곤 한다. 여전히 그건 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니까.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이 부끄러움을 감수해야지.
내셔널 포트레잇 갤러리
NATIONAL POTRAIT GALLERY
주소. St Martin’s Place, London, WC2H 0HE
보통 관광객들은 내셔널갤러리에서 바로 영국박물관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이곳을 빼먹으면 후회한다.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어 그야말로 사람에게 푹 빠질 수 있는 곳. 미술관 꼭대기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먹는 홍차와 스콘을 추천한다.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주소. Place Georges-Pompidou, 75004 Paris
퐁피두 센터 앞 광장을 지나다 보면 책 한 권을 들고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러브 프로젝트를 가장 많이 진행한 곳, 여기서는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있다.
레오폴드 미술관
LEOPOLD MUSEUM
주소. MuseumsQuartier, Museumsplatz 1, 1070 Wien
오스트리아 빈의 MQ지구 안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은 세계 최대의 에곤 쉴레Egon Schiele 미술관이다. MQ지구 광장에는 레오폴드 미술관 말고도 예술센터들이 몰려 있어 다양한 매력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든다.
글 사진 김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