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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가
작가와 작가
또 다른 감상법에 대한 이야기
하나의 작품을 다른 작품에 덧대어 바라본다. 화가 주유진의 그림을 보며 지금까지 나를 지나친 소설과 영화를 떠올렸다. 전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바라보는 것, 어쩌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모님은 네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하던데.”
“글쎄요. 가끔은 거짓말을 하죠. 제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말하는 게 낫죠.”
– 영화 <400번의 구타> 중에서
영화가 주는 감정과 그림 속 배경
그림 속 사람은 소년 같다. 아주 작은 아이도 아니고 다 커버린 어른도 아니다. 나이를 가늠하는 일은 상대적인 것이지만 나는 저 사람을 소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어딘지 모를 배경 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응시하고 있다. 소년이 속해 있는 곳은 어둡고 탁하며 색감이 흩어지는 방식은 다중적이다. 멀리서 보면 부드럽고 자세히 보면 거친 느낌을 준다. 더 가까이서 보면 오래된 흑백 영화의 질감과도 엇비슷하다. 그림의 어두운 배경이 그 안에 소년을 더 빛나게 하며, 이것은 흑백영화의 장점과 겹치는 지점이다. 인물을 좀더 솔직히 말하는 것, 그래서 그 인물에 더 공감할 수 있는 것. 이 두가지 장점이 작품에 담겨있다. 그림 속 사내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저 사람의 뒷모습일 뿐인데 무척이나 외롭게 느껴진다. 가장 아래에 칠해져 있는 푸른색은 바닷물 같기도 하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소년. 한 영화가 스치듯 지나간다. 어쩐지 익숙한 그림 속 장면은 영화 <400번의 구타>와 닮아 있었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400번의 구타>로 스믈 여덟의 나이에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는 방황하는 청소년이었으며 소년원을 자주 드나들었고 트뤼포가 유일하게 곁에 둔 것은 영화와 책뿐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고립되게 만들었을까.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 감독의 외로운 삶의 이유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림 속 소년은 영화 속 주인공과 묘하게 겹친다.
주인공의 이름은 앙트완. 열 네살의 그는 엄마와 새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자란다. 보호가 필요한 때에 작은 안락함마저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며 그 어떤 어른도 앙트완에게 따뜻한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장면은 앙트완이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는 장면이다. 조금이라도 미움받지 않으려면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컵을 꺼내야 한다. 사람들을 귀찮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밀가루를 왜 사오지 않았냐는 엄마의 꾸중에 아무 말 없이 밀가루를 사러 거리로 나선다. 보통 아이라면 어리광을 피우는 풍경이 더 익숙하지만 앙트완은 성실해야 했으며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에게 아주 작고 얄팍한 위로라도 괜찮다면 전해주고 싶다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 영화 속 가상의 인물에게 이토록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영화가 주는 먹먹한 감정은 그림 속 탁한 풍경과도 닮아있었다.
앙트완은 끊임없이 방황한다. 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앙트완은 결국 소년원에 잡혀갔고 도망쳐야 했다. 그는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달려나간다. 우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앙트완과 달리기를 함께한다. 달리는 동안 그는 앞을 보기도 하고 땅을 보기도 하며 가끔은 장애물을 지나친다. 그림 속 풍경은 앙트완이 달리고 달리다 마침내 땅의 끝, 바다에 도착했을 때 재현된다.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걸음을 멈춘다. 그림 속 소년처럼 어딘지 모를, 불투명한 곳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 속 소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영화의 마지막, 앙트완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 <400번의 구타>
삶이 항상 아름다운 건 아냐. 강은 바다로 가는 중에 많은 일을 겪어. 돌부리에 채이고 강한 햇살을 만나 도중에 잠깐 마르기도 하고. 하지만 스스로 멈추는 법은 없어. 어쨌든 계속 흘러가는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그리고 바다에 도달하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지. 그들에겐 끝이 시작이야.
– 소설 《리버보이》 중에서
조금은 다른 가치의 발견
어두운 푸른색 수면 위에 한 사람이 둥둥 떠 있다. 나는 자유로이 흘러가는 이 사람을 보며 오래전에 좋아했던 한 소녀를 떠올린다. 그녀는 소설 《리버보이》 속 제스다. 제스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며, 수영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의지했고, 할아버지 역시 손녀를 무척이나 아꼈다. 화가인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림을 그려왔지만 이제 마지막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되었다. 점점 쇠약해지는 건강 때문이다. 미완성이 될지도 모르는 그림과 함께 할아버지와 제스는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그림은 잔잔한 감동을 주지만 어딘가 아리송하다. 흐르는 듯 표현된 파란 배경은 수면 위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바다인지 강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제스가 강과 바다의 경계를 헤엄쳐 나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순간 그림 속 소녀가 떠 있는 공간을 강과 바다 사이, 그 어디쯤으로 정했다. 어떤 사람에게나 가족의 상실은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낸다. 제스에게 할아버지와 떠난 마지막 여행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강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년, 리버보이로 인해 서서히 늦춰진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많은 대화 없이도 헤엄치는 행위를 통해 연결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눠간다. 《리버보이》의 작가는 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할아버지는 결국 제스를 떠나지만 그녀에게 아낌없이 준 사랑은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언젠가 또다시 강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아간다.
그림 속 소녀는 가만히 누워 있으며 제목도 ‘스누징snoozing’이다. ‘낮에,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그림 속 소녀는 물 위에 떠 있지만 헤엄을 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이다. 제스 역시 이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쉼 없이 헤엄을 치다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아주 잠깐은 슬프면 슬픈 대로 멈추어서 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목이 메어버려 다시는 헤엄을 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느 선까지 울고 나면 눈물은 바닥난다. 그리고 그녀는 고독한 감시를 계속한다. 아니, 이제 그렇게 고독하지 않아, 그녀는 생각한다. 내게는 이 작은 것이 있다. 우리는 두 사람이다. 우리는 둘이서 두 개의 달을 올려다보고, 덴고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린다.
– 소설 《1Q84》 중에서
소설의 다음과 그림의 뒷이야기
내 첫 번째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1Q84》였다. 3부작에 걸친 긴 소설이 두렵기도 했지만 끝으로 갈수록 아오마메와 덴고의 이야기를 아껴서 읽었다. 책은 두 사람의 엇갈린 상황들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이 만나지 않았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이야기 하고있다. 주인공 아오마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는 공식적으론 고급 스포츠 클럽의 트레이너지만 사실은 킬러이자, 한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행동은 언제나 정확하고 단호하며 그 어떤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절제된 겉모습 속엔 깊은 상처가 배어 있고 이 상처는 그녀를 킬러로 만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소설 속에서 아오마메의 방은 꽤 자세히 묘사되는데 상상을 더해갈수록 그녀 안의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철저히 정돈되어 있는 집 안은 조금 춥게 느껴진다. 옷은 필요한 것만 한 종류씩 가지고 있고, 모든 물건은 아주 간소하게 자리 잡혀 있다. 아오마메만의 개성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방이 그녀의 외로운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일까. 정적인 방의 모습은 그 누구도 아닌 아오마메라는 사람을 분명히 말해주기도 한다.
그림 속 어두운 방은 황량하다. 그래서 아오마메의 방을 생각하게 한다. 여자는 침대 위에 앉아 방 밖에 있는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너무 어두워서 방 안에 있는 다른 물건들은 짐작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렵다. 네모난 공간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피부 색과 침대 색이 거의 같게 표현된 것은 그녀가 하얀 침대와 한 몸처럼 붙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얼마나 오래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 어두운 방 안 풍경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침대 위에서 보낸 시간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자는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꽤 커다란 희망처럼 보이며 방을 나갈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저 여자가 아오마메라면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덴고일까. 아니면 이제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희망일까. 소설의 중간쯤 아오마메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화분 하나를 집 안에 들인다. 무채색의 공간에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진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 한편, 작지만 따뜻한 불빛이 켜진다. 소설은 결말을 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아오마메는 덴고를 찾아냈고 오랜 연을 거쳐 둘의 관계는 이제 시작이다. 그림 속 여자도 언젠간 침대를 벗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 보기를. 그림 뒤에 또 다른 그녀만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The moon song>
I’m lying on the moon My dear, I’ll be there soon
나는 달 위에 누워 있어요. 그대여, 내가 곧 갈게요.
It’s a quiet and starry place
그곳은 조용하고 별빛뿐인 곳이에요.
Time’s we’re swallowed up In space we’re here a million miles away
우리가 있던 시간은 삼켜지죠 우린 멀리 떨어진 이 공간에 있죠.
– 영화 <her> ost 중에서
숨겨진 영화 장면 상상하기
두 사람이 서로 엉켜 있다. 눈을 꼭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상대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림을 본 자리에서 나는 그림 속 뒷이야기를 상상해보았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사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가까웠지만 만날 수 없어 서로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오늘 만났다.’ 포옹하는 이들의 모습이 내겐 조금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를 상상했던 걸까. 그저 직감적으로 떠오른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그리고 문득 영화 <her>가 나를 스쳐지나 갔다.
주인공 시어도어는 대필 작가다. 다른 이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고 있다. 가짜 편지를 부탁하는 세상이란 너무 외롭게 느껴진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가짜가 더욱더 진실같이 느껴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감정이 결여된 세상 속에서 자신에 대해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존재와 마주친다. 어렵고도 부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존재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운영체제이다. 그와 그녀가 대화하며 생각을 나누고, 또 사랑하는 순간들은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동시에 감출 수 없는 불안감도 함께 가져온다. 나는 영화를 보는 작은 순간들 사이에 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의심했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과연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이 복잡해 졌으며 그들이 헤어지는 순간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그들이 사람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단언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이 진심을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사만다는 시어도어를 떠났고 이들은 사랑했지만 단 한번도 서로를 만질 수는 없었다. 가장 가까웠지만 또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에 그림 속 주인공들을 시어도어와 사만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 속에선 나올 수 없는 장면을 나 혼자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림 속 그들은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동안 홀로 쌓아왔던 감정을 쏟아내며 앞으로의 시간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엉켜버린 그림 속 색깔들이 그와 그녀의 거리를 좁힌다.
나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름이 목에서 걸렸다. 두려움에 돌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또 움직이려고 했지만, 손을 뻗어 그 애를 잡으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 소설 《7번째 내가 죽던 날》 중에서
자세히 보려는 마음
자유롭게 늘어진 머리와 조용히 감은 눈. 부드러운 색감 속 여자는 잠을 자고 있다. 잠든 모습이 한없이 고요하다.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 깨워도 눈을 뜨지 않을 깊은 잠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소설 《7번째 내가 죽던 날》의 주인공은 잠든 그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처음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는 강렬한 표지 이미지에 끌려서였다. 곧 눈을 감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여자의 얼굴이 앞면을 가득 메웠고 이 그림을 본 순간 그 때 보았던 표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주인공의 이름은 사만다 이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샘으로 불렀기 때문에 나도 그녀를 샘이라고 불렀었다. 샘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을 뿐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던 중 원인 모를 타임루프에 걸려버린다. 그것도 자신이 죽는 날에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를 열렬히 응원했고 어째서 그 끔찍한 날에 타임루프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녀가 죽어가는 일주일 동안의 시간이었다.
그림 속 여자의 모습은 다양한 색감들로 이루어졌다. 두 볼엔 연한 붉은빛이 서려 있고 따뜻한 톤의 색감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다. 이마에서 머리로 연결되는 부분은 푸르스름하게 채워져 있다. 그 사이에 자리한 다른 색들은 자연스러운 연결을 도와준다. 꽤 많은 색깔들이 함께하는데도 일정한 톤과 부드러운 질감의 표현은 그림을 한곳으로 어우르고 있다. 나는 마음에 남는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 반복해서 읽어도 매번 새롭게 읽히는 글이 있듯이 그림을 느리게 보는 것은 내겐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일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샘은 죽음이 반복되는 가장 첫날 혼란과 공포를 느낀다. 그 다음 날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그 희망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또 다른 날엔 분노하고 자신을 놓아버린다. 마침내 일주일이 다 끝나갈 때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다. 샘이 매일같이 죽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그녀의 하루는 매번 새롭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말과 행동을 하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림 속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샘이라면 일주일간 그녀가 얻은 다양한 가치들이 다채로운 색감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7일간, 그녀는 매번 같은 아침 시간에 깨어나지만 얼굴 표정은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아주 선명하게 변한다. 그녀는 하루하루 성장해가는 것이다.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이제 그녀는 고요히 잠들어 간다. 그림 속 여자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마구 흔들어도 깨지 않을 깊은 잠을.
에디터 김지수
그림 주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