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좋은 납치

친구 많은 K씨의 일상

아는 맛, 지겨운 관계, 낯익은 어제와 오늘, 좀처럼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요즘의 나는 조금 허전하다. 선물 같은 뜻밖의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이름을 김권태로 바꿀까 봐. 그 이름보다 지금의 나를 더 잘 설명하는 단어가 없거든.” 술자리에서 그 말을 하고 다음 날, ‘미란이 형(라미란 배우를 닮음)’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파에 누워 〈용감한 형사들〉 호수 살인사건 편을 보던 중이었다. “30분 뒤에 집 앞으로 간다. 토 달지 말고 그냥 나와.” 미란이 형은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방송에선 이제 막 토막 난 사체가 호수 위에 떠오른 참이었다. 진지한 형사의 브리핑을 들으며 미적거리고 있는데, 잠시 후 또 전화가 울렸다. “빨랑 나와, 뭐 해!” 아, 귀찮아 죽겠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니 집 앞에 검은색 승합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 뭔데··· 읍읍!!” 미란이 형은 두꺼운 손으로 내 입을 막고 차 안으로 떠밀었다. 승합차 안으로 던져지며 “많은 납치 사건이 면식범에 의해 일어난다.”던 형사의 말이 떠올랐다. 순간 머릿속으로 탈출 시나리오를 세우는데, 차에 타고 있는 낯선 얼굴들이 내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 나는 인류를 처음 마주친 생물처럼 어리둥절해 있었다.

미란이 형의 사연은 이랬다. 여름휴가로 짝을 맞춰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한 명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짝이 안 맞게 되었다는 것. 그러던 중 삶이 권태롭다던 내가 떠올라 여행비를 ‘엔빵’하기 위해 납치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갈아입을 속옷도 없이 1박 여행을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항의했더니, 미란이 형이 내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은 있네. 그럼 됐어.”

네 시간의 긴 여정 끝에 동해에 도착했다. 미란이 형과 나, 이름 모를 친구들까지, 우리 여덟 명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다로 달렸다.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었는데 아뿔싸!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사장은 기름에 달군 불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압정을 밟은 사람처럼 날뛰다가 겨우 물속에 발을 담갔다. 그런데 왜 아무도 해수욕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여자 일행 한 명이 대답했다. “미란 오빠 앞에서 비키니를 입고 싶지 않아요.” 미란이 형은 자기도 취향이라는 게 있다며 혀를 찼다. 그는 정박해 있는 바나나보트를 가리켰다. “그럼 저거라도 탈까?” 그러자 이번엔 운전사 역할을 맡은 남자 일행이 대답했다. “렌터카 시트 젖으면 물어줘야 해. 타지 마.” 우리는 바다에 놀러 온 듯 아닌 듯 어정쩡하게 서서 사진만 찍었다. 멀리 보트가 일으킨 파도를 타고 미역과 불가사리 같은 바다 생물들이 떠밀려왔다. 나는 울긋불긋한 불가사리 사체를 주우며 생각했다. ‘참, 알쏭달쏭한 여행이군.’ 우리는 딱히 한 것도 없이 다시 차에 올랐다. 맨 뒷자리에 앉은 나무늘보를 닮은 남자 일행이 말했다. “그래도 바다를 봤으니 대만족!”

펜션은 어느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 있었다. 구불구불 오솔길을 한참 오르자 수영장을 낀 멋진 저택이 나타났다. 일행들은 외국에 온 것 같다며 기뻐했다. 미란이 형이 고무줄이 다 늘어난 수영복을 빌려줬고, 나는 허리춤을 잡으며 거의 탈진할 정도로 수영했다. 선베드에 누워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봤다. 아침까지만 해도 소파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히키코모리였는데, 저녁엔 태닝을 하며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명탐정 코난’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코난이 나타나는 곳에선 항상 사건이 일어나고, 그 무대는 늘 인적 드문 산장이다. 하필 인원도 여덟 명, 만약 살인을 저지르고 싶다면 지금이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는데, 하나같이 의심스러운 구석이 보였다. 그렇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고기는 먹고 죽어야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펜션 바비큐장에서 미란이 형이 고기 굽고 있었다. 그는 고기를 너무나 좋아하고, 고기 굽는 일은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릴로 땀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절대 집게를 넘기지 않았다. “소금 간이 아주 제대로 배겠어!” 미란이 형의 여자친구가 말했다. 그녀는 땀이 떨어진 고기를 모아 크게 쌈을 쌌다. 그러고는 미란이 형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결자해지!” 나는 그 더럽고 따뜻한 관계가 꽤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반쯤 그을린 고기를 먹고, 산모기에 물리고, 소맥을 마시고, 팀을 짜 게임을 했다. 80년대생인 우리가 아는 최신 술 게임은 ‘배스킨라빈스 써리원’뿐이었다. 그마저도 나이 많은 팀의 차례가 되면 템포가 느려졌다. 미란이 형은 감바스며 짜파구리며 자꾸만 음식을 내왔다. “많이 먹고 많이 싸. 똥을 싸고 자야 다음 날 숙취가 없어.” 그의 말을 들은 모두가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야유했다.

저녁 10시도 되지 않았는데, 나무늘보를 닮은 남자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여자가 그의 뺨을 때렸다. 아무래도 둘은 썸을 타고 있는 듯했다. 그때 사라졌던 미란이 형의 여자친구가 방에서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다. 초의 숫자를 보니 주인공은 미란이 형이었다. 얼떨결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생일 축하 송을 불렀다. 미란이 형은 눈시울을 붉히며 초를 불었다. 준비한 선물이 없는 나는 낮에 주운 불가사리를 그에게 건넸다. “뭐야, 어부야?”, “자연주의자야.” 선물 증정식 후, 코를 훌쩍이며 미란이 형이 말했다. “음··· 사실 내 생일은 다다음 달이긴 해.” 선물을 건네던 그의 여자친구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생일은 아니지만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 너희의 사랑이 느껴져. 흐흙···.” 그는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사연인지 여자친구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호르몬 때문일 거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은 이미 언니라 부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내친김에 캠프파이어도 했다. 남은 장작을 둥글게 쌓고 불을 붙였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아 흩날리는 불씨를 바라봤다. 나무늘보맨이 종이컵에 촛불을 꽂아서 나눠주었다.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경험했던 촛불 의식 같은 건가? 왠지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게 궁상인지 낭만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쥔 촛불을 바라보며 우리는 각자 생각에 잠겼다. 납치에 가까운 동행, 어쩌면 끝내 이름을 외우지 못할 일행들, 들어가지 못한 바다와 주인공 없는 생일 파티, 문득 이 순간이 무척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십 대의 두근거림은 부정맥을 의심해야 한다지만, 어쩐지 그 이상한 하루를 떠올리면 여전히 기분 좋게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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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