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바보 같은

황인숙의 『인숙만필』

따뜻하고, 바보 같은

황인숙의 『인숙만필』 

겨울이다. 따뜻한 것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핫 초콜릿이라든지 관대한 군고구마, 다정한 벙어리장갑, 사려 깊은 담요 같은 것들. 

그리고 지금 소개할 한 여류시인의 기품 넘치는 산문집도 함께하면 좋겠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젊어서 ‘뭐든 할 수 있다’며 긍정을 떨다가 나이가 들수록 ‘이 더러운 세상!’이라며 부정의 늪에 빠지는 쪽보다는, 차라리 젊을 때 암적인 존재의 포스를 풍기다가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광명을 찾는 쪽이 나은 것 같다. 그렇다고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닙니다.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거예요!”라고 외치는 노홍철식 긍정주의가 내 취향인 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긍정주의의 마지노선은 딱 여기까지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태어났다. 아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더불어 천국이나 낙원에 나까지 들어가면 발 뻗을 자리가 없을 것은 빤하다). 세상은 원래 더러운 곳이고, 사람들은 내 맘 같지 않다. 그러니 불평한들 뭐가 달라지리. 그냥 즐겁게 살자. 

하지만 이런 자포자기적 긍정주의를 고수하면서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은 ‘세상은 원래 더러운 곳이고, 사람들은 다 내 맘 같지 않다’에서 사고가 멈추면서 세상을 증오하고 사람들을 저주하다가 결국 밤 12시에 사바나의 맹수처럼 치킨을 물어뜯게 된다. 위험하다. 그래서 가끔씩, 아니 종종 위로와 힘이 되어줄 책들이 필요하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무자비하고 차가운 바람에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겨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힐링이라든지, 위로라든지, 처세라든지, 메시지, 일침, 죽비, 철퇴 같은 낯 뜨겁고 무시무시한 단어들을 굳이 갖다 붙인 책은 싫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책도 싫다.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내 단점들을 30년 사귄 고향 친구처럼 속속들이 지적해 준다면 10년 묵은 때라도 벗긴 듯 속이 시원하긴 하겠지만, 목욕탕을 나서면서 왠지 벌거벗은 기분이 들 것 같다. 어쨌든 때도 나의 일부였던 것이니까.

시인 황인숙이 쓴 『인숙만필』은 손가락이 곱을 정도로 추운 날에, 누군가가 주머니 속에 감춰두었다가 내민 따뜻한 손 같은 책이다. 『인숙만필』이라니, 어쩐지 촌스럽고 귀엽지 않은가. 책 뒤 표지에는 ‘기품, 그래, 기품. 황인숙은 기품 있는 여자다’로 시작하는 작가 고종석의 발문이 있다. 

기품? 기품이 있다는 건 뭘까? 왜, 어떤 예쁜 여배우나 어떤 사모님은 예쁜데도 기품 있어 보이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기품 있어 보이는 이유는 기품 있는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말투와 행동 때문일까? 옷과 가방과 돈 때문일까? 그렇다면 1958년생의 가난한 독신 여성인 이 시인은 대체 무엇 때문에 기품 있다는 걸까?


기품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황인숙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움츠러들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젠체하지 않는 것도 내면의 간결한 자기긍정 없이는 힘들다. 

– 고종석, 『인숙만필』의 발문 중에서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머리는 부스스하고 차림새는 변변치 않다. 말투도 어눌하고 도무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짓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력적인 사람.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그런 사람. 

황인숙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꼭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상상에 빠지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단출하고, 군더더기나 꾸밈이 없다. 자신이 멋있게 보이는지, 예뻐 보이는지, 매력 있어 보이는지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데 이렇게 투박하게 쓸 수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 투박한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 연필로 꾹꾹 눌러쓴 것 같은 독특하고도 따뜻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이쯤에서 개미와 휴전을 하고 싶다. 이 집을 떠나든지, 나와 영역을 확실히 다르게 해서 같이 지내든지, 내 몸에 위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나도 할 일 많고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에 개미들이 자자손손 번영하여 제국을 이룬다고 해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사실 개미는 얼마나 조용하며 글자 모양으로 예쁘게 생긴 생물인가 말이다. 

– 황인숙 『인숙만필』 중에서

그녀는 단순하고 솔직하고 엉뚱하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남의 장례식장에서 절하는 법을 몰라 헤매는가 하면, 미녀들은 모두 낡고 구멍 뚫린 팬티를 입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고,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에 얼굴이 굳어지는 선배를 보며 그의 지적 미감이 자신으로 인해 다쳤을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녀는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는 대체적으로 무심해 보인다. 책을 읽다 보면 왠지 커다란 코트와 펄럭거리는 긴 치마에 워커를 신은 차림으로 턱 끝을 살짝 치켜든 채 폐허 속을 표표히 산책하는 한 여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인숙만필』은 추운 겨울밤, 잠들기 전에 야금야금 읽어야 제맛이다. 침대든, 소파든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간접조명을 밝힌다. 무릎에 담요를 덮은 뒤 따뜻한 차나 코코아를 홀짝거리면서 하루에 한두 편씩 읽는다. 매일매일 체온이 1도는 올라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들 수 있다. 

 

끓인 물을 큼지막한 사발에 붓는다. 잠시 식힌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에 분유를 넣고 젓는다. 평화롭고 달콤한 냄새가 김을 타고 올라온다. 사발 가장자리에 잘 풀어져 녹은 분유의 순한 거품이 자디잔 레이스처럼 둘러쳐진다. 뜨거운 물에 탄 분유는 데운 우유와 또 다른 맛이다. 우윳빛 맛, 유순하고 무구한 맛, 따뜻하고 바보 같은 맛이다. 

– 황인숙 『인숙만필』 중에서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내 동생>이다. 작가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남편인 회사원 남동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근 경제적으로 곤란해진 남동생에게 누이는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라며, 인생은 짧다고 위로한다. 그러자 동생은 한국인 남자의 평균 수명을 들먹이며 앞으로 40년 살 만큼 벌어야 하기에 인생은 짧지 않다고 대꾸한다. 자기가 선망하던 학과에 가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동생. 그녀는 그런 동생을 안타까워하며 ‘회사원이란 나 같은 자유직 사람과는 달리 인생에 보너스가 없는 존재인데, 보너스 없는 인생은 마음에 여유를 갖기 힘들 것이다. 내 동생의 인생에도 좀 보너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쓴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동생과의 어린 시절의 일화를 덧붙인다.

 

아마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내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가니 내 동생이었다. 대문을 열어주었는데 들어오지 않고 나한테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애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장갑 한 짝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많이 놀랐다. 온 식구한테 귀여움을 받고 있는 내 동생이 장갑 한 짝을 잃었다고 그토록 걱정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눈이 온 길을 뚫어져라 살피며 걷고 걸었다. 결국 장갑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 동생은 찔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면목 없고 무거운 마음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그때 눈 속에서 보란 듯이 장갑을 찾아내 주었다면 내 동생은 얼마나 환하게 웃었을까? 이 누님을 얼마나 미덥게 생각했을까? 

– 황인숙 『인숙만필』 중에서

황인숙의 투박한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읽고 나면 내가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남들에게는 정말이지 하찮은 것처럼 보일 것 같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는 발에 채일 정도로 감동적인 것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세상은 진정으로 살 만한 곳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세상이 아무리 미친 듯이 돌아가도, 이 여류 시인만큼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동네 고양이들의 밥을 주고 냉장고를 열어 블루베리 요거트를 푹푹 떠먹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거나 밤늦게까지 열 달 쌓인 사채 이자를 갚는 기분으로 일을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게으름을 피울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속 깊이 안심이 된다. 이근화의 시에서처럼 ‘테이블처럼 즐겁고 반듯해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지구가 살짝 기울어진 상태를 유지하도록 황인숙이 불철주야 떠받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올 여름 지나 처음으로 점퍼를 걸치고 산책을 나섰다. 호주머니 속에서 지갑과 수첩과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지구 끝까지라도 걸을 수 있을 것같이 든든한 기분으로.

 – 황인숙 『인숙만필』 중에서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에디터 이혜인

글 한수희 사진 김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