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여행 노트

당신이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여행 노트

언제 어디서나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왜 여행은 우리가 보는 것들을 그토록 낯설게 만들까. 그리고 선명하게 남을까. 새롭게 들여다보게 된 나의 마음, 거리의 풍경, 마주치는 사람들…. 어디서든 무언가를 쓰고 그릴 수 있지만, 여행지에서 마주한 것들은 이렇게 특별하다. 당신이 누구든, 그곳이 어디든 말이다. 다섯 사람이 응시하고 발견한 순간을 담은 다섯 개의 여행 노트.

정수진
디렉터

정수진은 그가 속한 회사 내에 있는 패션 브랜드의 잡화 아이템을 디렉팅하는 디렉터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아는 여행자다. “Good morning.”이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메모지, 손으로 오린 듯 가장자리가 매끄럽지 않은 고양이 모양의 종이 위에 올려둔 팁과 곁에 놓인 “Thanks.”라고 쓴 말풍선. 이는 그가 호텔에 두고 떠난, 사진으로만 남긴 것들이다. 그의 여행 노트는 그 자신의 것이면서 때로는 다른 이의 선물이 된다.

언제부터 여행 노트를 쓰기 시작했나요? 

2010년부터인 것 같아요. 여행과 출장을 다니며 그곳에서 지낸 기억을 남기고 싶어서 일기를 쓰듯 시작하게 됐어요. 여행 갈 때 노트와 그릴 거리를 챙기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고 허전하고, 이제는 어느덧 작은 습관이 됐네요. 최근에 다녀온 여행은 일본 도쿄로, 4박 5일간의 출장이었어요.


주로 무엇을 기록하나요? 

그날 가본 맛있는 식당이나 다시 가고 싶은 찻집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고, 출장 첫날 시장조사를 하고 사고 싶은 걸 쇼핑 리스트로 그려뒀다가 다니는 내내 보이면 하나씩 사 모으기도 해요. 출장으로 간 곳에서는 대부분 옷이나 액세서리에 대한 리스트업이 많긴 하네요. 그리고 함께 여행을 온 친구들을 그리기도 합니다. 여행 중엔 평소와 다른 표정, 다른 순간이 보이거든요. 근래에는 트래블 팔레트(작은 사이즈의 붓과 팔레트 세트)를 챙겨 다니면서 쉴 때 동행자를 그리고 여행이 끝나면 짧은 메모를 써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선물하기도 해요. 순간을 공유하던 사람들에게도 기억이 될 만한 뭔가를 남겨주고 싶거든요.


언제 노트를 쓰는 편인가요? 

비행 시간이 길 때는 비행기 안에서 쓰기도 하고, 큰 가방을 들고 나가는 날에는 노트를 가방 안에 넣고 다니다가 차 마실 때 잠깐 적기도 해요. 그래도 대부분은 하루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잠들기 전인 것 같아요.


여행 노트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몇 년 전 혼자 볼로냐로 출장을 갔는데, 그해에 유독 눈이 많이 와서 며칠 동안 비행기가 연착되고 결항했어요. 그날도 ‘오늘은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하며 짐을 챙겨 공항에 갔죠. 제 생일이었어요. 역시나 비행기는 뜨지 않았고, 공항에서 속상하고 슬픈 마음에 여행 노트에 “슬픈 내 생일….”이라고 그림일기를 쓰고 커피를 사러 나오며 노트를 깜빡 잊고 두고 왔어요. 그런데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던 분이 저를 알아보고 노트를 찾아주셨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Today is your birthday? Happy birthday!” 하시는 거예요. 혼자 남겨진 공항에서 낯선 이에게 받은 따뜻한 생일 인사와 잃어버릴 뻔한 여행 노트를 다시 찾은 특별한 생일이 되었어요.

 

여행 노트를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노트는 내 기록의 친구이기도 하고, 일상을 떠나 다른 세상에 갔을 때 마주한 내 감정을 담는 가방 같기도 해요. 여행에서 느낀 행복을 그곳에 두고 오기엔 아깝죠. 담아 와야죠. 그래야 나중에 꺼내 볼 수도 있고요. 노트의 기록에는 해상도 좋은 사진으로도 다 표현해내지 못하는 개인의 특별한 서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여행 노트로 선호하는 노트나 형태가 있나요? 

무겁거나 너무 두껍지 않은 게 좋아요.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면 더 좋고요. 요즘은 글로 남기는 것보다 한 장짜리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서 선이 없는 스케치북 같은 형태의 노트를 쓰고 있어요.

손은경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의 철학가와 세 명의 작가를 다룬 책의 표지,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달라고 하는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 우연히 넘겨본 잡지의 한 부분에 손은경의 그림이 있다. 쓱싹쓱싹 소리가 날 것 같은, 선을 그대로 드러낸 그의 그림들은 거친 듯 부드럽다. 그가 가진 다정한 시선 덕분일 테다. 그 시선은 마카와 색연필로 남긴 그의 여행 노트에서도 드러난다.

이 노트는 언제 어디로 떠난 여행의 기록인가요? 

작년 9월 런던, 암스테르담 그리고 베를린의 기록입니다.


주로 무엇을 기록하나요? 

순간순간의 감정을 글로 쓰거나 아름다운 것을 그림으로 남겨요. 가끔 잊지 않고 기억해둬야 하는 것도 적어 두고요. 동행자와 나눠야 할 잔돈이 있다거나 바나나는 A 마트보다 B 마트가 더 싸다, 같은 것들이요.


언제 노트를 쓰는 편인가요? 

때가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일과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노트를 펼친 것 같아요.


여행 노트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긴 여행 동안 늘 친구와 함께였는데, 암스테르담에서 딱 하루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어요.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걷다가 추워서 제일 먼저 들어오는 트램에 무작정 올라탔어요. 그때 대각선 앞으로 보이는 아저씨의 책 읽는 뒷모습이 멋져서 허둥지둥 그림을 그린 게 기억에 남아요. 그림을 완성하기 전에 내리실까 봐 거의 크로키 수준으로 러프하게 그렸는데, 다 그리고 나서 인증 사진까지 찍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아저씨가 내리시더라고요. 그날 하루가 통째로 마음에 들어서 그림을 인스타그램에도 업로드했어요.

 

여행 노트를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귀여운 것, 신기한 것, 놓치고 있던 것. 일상에서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수집하는 재미요. 이번 여행에서는 방문하는 뮤지엄 아트 숍의 종이봉투, 사람들 뒷모습 사진, 새로운 (의미의) 단어, 동행자의 사소한 버릇을 수집했어요.

 

여행 노트로 선호하는 노트나 형태가 있나요? 

A5 크기 정도의 무지 노트나 드로잉북을 챙깁니다.

박진영
작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박진영은 로스앤젤레스를 베이스로 활동한다. 2017년, 에세이, 단편소설, 사진 등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접근으로 돌을 다룬 첫 번째 책 《펠트》를 출판했으며, 지금은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무엇이든 잡동사니처럼 쌓아두고 시간이 지나 표면 아래로 내려앉으면 그때 다시 되돌아본다는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지난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이 노트는 언제 어디로 떠났던 여행의 기록인가요? 

2017년부터 오늘까지 방문했던 곳들. 캘리포니아주 라호야 해변과 샌프란시스코, 일본 교토와 나오시마, 우리 동네 등 순서 없이 내키는 대로 그린 거예요. 


주로 어떤 것들을 기록하나요? 

여행 도중 찍은 사진들을 ‘재기록’ 하고 있어요. 파일로 컴퓨터를 떠도는 게 아까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언제 노트를 쓰는 편인가요? 

여행에서 돌아와 집이나 동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더 잦아요. 여행 도중에 노트를 펼친다 해도, 지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면서 과거를 기록하는 편이에요. 


여행 노트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2017년 8월 교토. 일어나면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안 먹던 아침밥을 매일 같이 챙겨 먹을 때였어요. 기이한 시기였죠. 그때 다이마루 백화점 뒷골목에 있는 신신도 빵집을 자주 들렸는데, 그곳 창가 자리에서 그 노부부를 처음 봤어요. 흰 야구모자를 쓴 청바지 차림의 할아버지와 가지런한 소지품을 훤하게 드러낸 PVC 핸드백을 가진 할머니. 순간, 같은 곳 비슷한 시간에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저희 부부는 그날부터 그곳 창가 근처 자리에서의 아침 식사를 고집하게 되었어요. 감사하게도 빵은 늘 맛있었고, 신신도 히가시노토인점의 노부부는 반복되는 풍경이었어요. 오늘도 아마, 일본 감성의 미국식 조식에 커피를 드실 거예요. 아,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게 전부일 줄 알았는데, 마침 교토를 떠나는 날 할머니가 저희를 알아보셨어요. 몰라서 더 아름다운 일어로 조곤조곤 인사를 건네셨죠. 아마 귀엽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그때 알게 되었어요. 우리는 교토의 한 평범하고 멋스러운 노부부의 아침을 보내고 있구나, 잠깐이지만 귀여워지고 있구나.


여행 노트를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손에 묵직하게 잡히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만들고, 남기려 해요.


여행 노트로 선호하는 노트나 형태가 있나요?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데, 노트는 그런 걸 사게 되면 관상용으로 썩히게 되는 것 같아요. 적당히 크고, 가방에 들어가고, 얇은 종이에 잉크가 다음 장으로 스미지 않으면 좋겠죠. 하지만 딱히 기준은 없어요.

유지혜
작가

유지혜는 《조용한 흥분》, 《나와의 연락》, 두 권의 여행책을 낸 작가다. 책에는 꼭 맛봐야 할 음식이나 가봐야 할 장소가 나열되어 있지는 않다. “바라고, 당하고, 잊히고, 흩어지고, 부대끼면서” 만난,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의 성장통이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담겼을 뿐이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에게 안부를 보내는 그 여행기를 읽으면, 나도 길가의 카페에 들어가 노트를 펼치고 싶다.

이 노트는 언제 어디로 떠난 여행의 기록인가요? 

2015년 파리와 런던 여행의 기록이에요.


주로 무엇을 기록하나요? 

오늘 간 곳, 본 것, 먹고 마신 것, 만난 사람, 마음가짐, 다짐, 여행 중 읽은 책의 글귀, 영화 대사, 자잘한 쇼핑 목록, 익숙해진 숙소 주변 지도, 동네 카페 주소, 대화, 아이디어 등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적습니다.


언제 노트를 쓰는 편인가요? 

언제나. 스시집에 앉아서도 쓰고,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호스텔에서도, 미술관에서도 써요. 하루의 시작과 중간, 끝의 구분 없이 생각나는 것을 항상 쓰고 있어요. 주로 혼자 다니기 때문에 노트에 무언가를 적는 건, 내가 나와 말하는 행위 같아요.


여행 노트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여행 도중 몸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졌을 때 병실에서 쓴 일기가 기억에 남아요. 수혈 때문에 부은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삐뚤빼뚤 썼죠. 펜도 노트도 챙겨올 수 없었기 때문에 간호사분께 펜과 A4 종이를 부탁했어요. 서럽게 울면서도 그 시간이 만족스러웠어요. 그 일기는 처절하고 외로워서 더욱 소중해요. 그때 여행과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아주 많이 적었어요.


여행 노트를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자유의 선물. 쓰는 것은 생각과 내 가능성을 자유롭게 해요. 특히나 여행에서 느낀 모든 것을 세세히 기억하고 흡수할 수 있게 해서, 기록이 없다면 제겐 여행도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쓰는 행위가 너무나도 재미있어요. 추억하기 위해서,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그 순간에 빠져있고 싶기 때문에 써요.


여행 노트로 선호하는 노트나 형태가 있나요? 

장수가 많고 재질이 부드러운 노트를 좋아해요. 크기는 다양해요. 브랜드를 꼽자면 무인양품의 스케치북과 노트를 좋아합니다. 거칠게 갈겨써도 좋은 재질이에요.

김유진
카피라이터

‘Moment Collector’, 김유진의 SNS 자기소개란에 카피라이터와 나란히 적힌 단어다. 일상이든, 스마트폰 속 세상이든, 그가 모은 사진과 문장을 보고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때가 많다. 그가 여행을 떠나 노트에 남긴 기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유진이 찾은 영감은 인스타그램에서 ‘#오늘의영감님’이라는 해시태그로도 볼 수 있다.

이 노트는 언제 어디로 떠난 여행의 기록인가요? 

2016년 10월 규슈 여행의 기록입니다.


주로 무엇을 기록하나요? 

그날의 루트, 인상적인 장면과 사람들, 읽고 있던 책 등이요.


언제 노트를 쓰는 편인가요? 

커피를 마시며, 혹은 샤워 후 맥주를 마시며. 여행 노트와 관련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구마모토의 나쓰메 소세키 옛집을 찾아간 날이요. 인적 없는 길, 땡볕에 모기에게 다리를 내주며 걸어 걸어 도착했는데, 휴관일이었어요. 바로 전에 들른 구마모토성도 보수 공사로 막혀있던 터라 더 맥이 풀렸어요.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정원 문이 열려있더라고요. 손바닥만 한 정원을 서성이며 작가의 집을 바라보다 나오는데 단정하게 차려입은 일본 할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어요. “여기, 오늘 안 연 건가요?”,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정원을 볼 수 있던데요.” 대화와 함께 서로 겸연쩍은 미소를 주고받았어요. 전날 밤 노트에 옮겨 적은 《풀베개》의 구절이 떠오르며, 하루의 허탈함이 녹아내린 순간이었어요.


여행 노트를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기억력이 나쁜 나를 위한 단서. 또 기록하고 그 조각들을 잇다 보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이 나아가기도 해요.


여행 노트로 선호하는 노트나 형태가 있나요?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작고 얇고 가벼운 노트요. 가방이 무거우면 행동력이 떨어지니까요. 보통 여행 첫날 문구점을 찾아서 그런 노트를 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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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