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베로 김형규의 코믹 프리즘

안녕, 독일의 미녀님, 다음에 또 만나요!

안녕, 독일의 미녀님
다음에 또 만나요!

닥터 베로 김형규의 코믹 프리즘

어린 시절 독일의 멋진 미녀를 만나게 되면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Hallo, Deutsche der Schönheit! Auf Wiedersehen!” 무슨 뜻이냐고요? “안녕, 독일의 미녀님. 다음에 또 만나요!”라는 말이죠. 말을 배우고 말을 하기까지, 우리는 어떤 힘을 갖게 되는 걸까요? ‘언어’라는 이야기를 둔 하나의 프리즘Prism을 이야기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학년인가를 보낸 후에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 했습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언어는 독일어, 불어, 일본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왜 독일어를 선택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독일어가 왠지 더 멋져 보였는지, 아니면 영어와 어순이 같아서 점수를 받기가 조금 쉽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인지, 혹은 1991년 11월 11일에 발표된 신승훈 형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앞머리에 흘러나온 베토벤의 가곡 ‘Ich Liebe Dich사랑합니다’ 부분이 너무 멋지게 들렸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심증적으로 신승훈 형님의 노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네요.

“Ich liebe dich, sowie du mich, am Abend und am Morgen, 이히 리베 디히 조뷔 두 미히 암 아벤트 운트 암 모~르겐, 사랑해선 안 될 게 너무 많아, 캬!” 라고 공책에 깨알같이 적어놓고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날 사랑하듯이 저녁에도 아침에도” 라고 번역을 하며, 중얼중얼 외우자 외워…. 매우 중요한 문장이야. 독일에 가면 꼭 써봐야겠어. 중얼중얼. 독일의 미녀에게 꼭 이 문장을 들려드리리. “음, 역시 독일어는 뭔가 멋진데? 제2외국어는 독일어로 해야겠어! 음헛헛헛!” 하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겨울 방학의 고등학생 김형규 군을 상상합니다. 거의 99.87퍼센트의 확률로 정확한 영상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듯합니다. 아아, 나란 존재여. 그런 이유였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이놈아. 여러분은 지금 가요 한 곡이 다른 나라의 언어와 이미지를 미화시키는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뇌 내 망상과 공상으로 독일어를 선택했기에 2년 동안 독일어를 공부하며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시험점수는 매번 백 점이었더라도 지금 제가 기억하는 독일어라곤 신승훈 형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이히 리베 디히’ 저 문장 하나와 정관사 1격에서 4격 외우는 방법-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다스데스뎀다스 디데어덴디-이 전부입니다. 다른 세계의 소환수를 불러오는 주문인가요…. 고등학교 때 배운 많은 지식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아리송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 대부분이 독일 미녀가 노를 젓는 망각의 나룻배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어도, 강렬하게 제 기억 속에 각인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학교 때 국어 시간에 배운 “언어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이다. 말은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라는 내용입니다. 독일 언어 철학의 중심인물인 훔볼트Humboldt 선생님께서, (또 독일이네요…음…일부러 독일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얼중얼)언어를 에르곤이 아니라 에네르게이아로 파악하고 ‘내적 언어형식Innere Sprachform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요, 아 이게 무슨 소리일까. 눈으로 읽고도 당최 이해가지 않습니다.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은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언어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는 이 내용이 제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울림으로 새겨졌습니다. 

갑자기 만화에 등장하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등장인물 중에,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릴 만한 캐릭터는 누가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말을 너무나도 잘하는 달변의 인물도 있을 것이고, 짧은 대사로 촌철살인의 묘미를 보여주는 캐릭터도 있죠. 또 말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언령言靈’, ‘언혼言魂’의 힘을 가지는 주인공도 있습니다. 이 언령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신앙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신·구약 성경을 포함하여 우리나라는 물론, 전 인류적으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착한 말을 사용하자. 나쁜 말을 사용하지 말자. 유치원 때부터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죠? 소리를 내어 말한 언어가 실제 현실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길한 말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이에요. 덕담, 축복, 악담, 저주처럼요.

언어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구사하는 인물로는 누가 뭐래도 오카노 레이코 선생님의 유려한 작품인 《음양사》의 ‘아베노 세이메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유메마쿠라 바쿠의 원작소설을 데즈카 오사무의 며느리로 알려져 있는 (과연 사실인지는 아무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오카노 레이코님의 작화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베노 세이메이는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남녀노소, 인간과 자연과 정령, 사물과 영혼을 통틀어 가장 섹시한, 아니 섹시하다는 말은 너무 말초적이네요. 색기色氣로 바꾸어볼까요? 색기를 지니고 풍기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유려한 말솜씨, 격조와 품위 있는 움직임이 대단한 인물이죠. 그가 1권에서 또 다른 주인공인 미나모토 히로마사와 나누는 대화는 에네르게이아로서의 언어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히로마사,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란 뭘까? 가장 짧은 저주란 이름이네. 산이나 바다, 나무나 풀, 그런 이름들도 저주의 하나네. 저주는 곧 존재를 속박하는 거야. 사물의 근본적인 실체를 속박하는 게 바로 이름이지. 이를테면 자네는 히로마사라는 저주를, 나는 세이메이라는 저주를 받고 있는 사람이란 소리일세.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 게다가… 눈에 안 보이는 존재조차 이름이라는 저주로 속박할 수가 있지.”

그야말로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힘을 표현하는 대사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입 밖으로 표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근육에 힘을 전달하여, 발성 기관을 통해 성대와 구강구조물을 울리며 몸 밖으로 나오는 음파의 진동. 이 소리가 단지 그냥 그렇게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지고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능력인 것이죠. 누군가 저에게 “형규야 이리 와 봐!” 하고 외치면 저는 그 소리가 나는 곳이 어디인지 찾고 그 장소로, 혹은 그 인물에게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평생 동안 제 이름이 저란 존재를 대단히 단단하게 속박하고 있으며, 물리적인 접촉으로 직접 저를 잡아 끌어당기지 않아도, 언어 자체가 스스로 힘을 가지기 때문에 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언어가 가지는 힘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주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음양사》는 13권으로 완결이 나는데요, 후반부로 갈수록 아무리 정신줄을 잡고 내용을 읽어도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을 뜨고 있어도 몽롱한 꿈속에 있는 듯한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내가 읽고 있는 만화책의 언어가 한국어가 분명한데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묘한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유려한 아름다움에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죠.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작품이니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언어의 달변가 주인공을 한 명 더 꼽으라면, 쿄고쿠도 시리즈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우부메의 여름》 등에 등장하는 ‘츄젠지 아키히코’를 들 수 있습니다. 고서점 주인으로 위에 소개한 아베노 세이메이를 모시는 신사의 신주이면서 여러 사건의 진상을 해결하는 명탐정 같은 인물입니다. 셜록 홈즈나 그의 형 마이크로포트 홈즈, 혹은 엘큘 포와르처럼 사건 현장에 가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 안락의자에 앉아서 추리를 해내는 사고력이 대단한 인물입니다. 만화책에서 츄젠지 아키히코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마치 제가 그와 같은 거실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가 입을 열때마다 그의 이야기에 온 정신이 쏙 빨려들어 갑니다. 말로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는 그야말로 달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면에 빨려들어 가는 듯한 언어의 마술사인 셈이죠.

이렇게 말을 너무 잘해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경우도 있지만, 대사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묵직한 충격으로 전해져 큰 울림을 주는 만화가 있습니다. 바로 이가라시 미키오 선생님의 《보노보노》입니다. 귀여운 그림체와 주제가로 큰 인기를 끌었고, 캐릭터 상품이 워낙 많이 나왔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원작 만화는 읽다 보면. 깊은 한숨과 함께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듯한 충격을 받습니다. 제가 꼽은 세 가지의 《보노보노》 명대사를 만나볼까요?

너부리 보노보노, 도대체 넌 아는 게 뭐가 있냐?
포로리 너부리야, 보노보노는 모르는 게 아냐. 알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보노보노 내가 어른이 되면 누군가가 “됐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아직 안 됐으면 “안 됐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좀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럼 나도 좀 알 것 같다

도로리 누나 다른 사람의 욕을 그대로 믿는 건 그 욕을 한 사람만큼이나 나쁜 거야.

보노보노 재미있는 건 왜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
야옹이 형 재미있는 게 끝나는 이유는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을 반드시 끝내기 위해서란다.

보노보노가 언제나 찾아가 질문을 던지는 숲속의 현자 야옹이 형. 보노보노의 순진하면서 엉뚱한 질문과 야옹이 형의 진지하면서도 삶을 생각하게 하는 답변들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진지한 시간을 선물합니다. 언어는 이렇게 우리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 만화책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요. 야옹이 형의 명대사로 이번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면이 이제 끝이 나기에 갑자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매우 곤란해지는군요. 곤란합니다 곤란해요. 

야옹이 형 보노보노, 살아 있는 한 곤란하게 돼 있어. 살아 있는 한 무조건 곤란해.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윈 결코 없어. 그리고 곤란한 일은 결국 끝나게 돼있어. 어때? 이제 좀 안심하고 곤란해할 수 있겠지?
보노보노 네, 야옹이 형. 

이번 호 안심하고 곤란해 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안심, 곤란, LOVE & PEACE, PEACE.

닥터 베로를 찾아온
손님 목록

음양사
오카노 레이코ㅣ씨앤씨미디어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공존하던 시절, 한 음양사와 한 왕족이 만난다. 하늘과 땅의 조짐을 읽는 음양사는 귀족들에게 차례차례 벌어지는 이상하고 끔직한 일들을 조명하고 어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는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쿄고쿠도 시리즈
나츠히코 쿄고쿠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새의 우리》 등 나츠히코 쿄고쿠 작가의 시리즈 작품이다. 잭방주인 외에 음양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추젠지 아키히코’의 주변에 요괴와 추리에 관한 음산하고 몰두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보노보노
이가라시 미키오ㅣ거북이북스

생각 많고 질문은 더 많은 아기 해달 보노보노. 작고 약하지만 귀여운 고집을 가진 포로리와, 툭하면 화를 내지만 잔정 많은 너부리와 함께 숲속의 일상을 그러낸다. 단순한 그림과 섬세한 웃음, 다정한 말들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면서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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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