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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선
다정한 홍차에게
최예선
마시는 일은 결국 나누는 일이다. 테이블 위 한쪽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애정을 나눈다. 초 단위로 살아가던 하루의 여분을 소중히 여기며 사람들은 무언가를 마신다. 어느 오후, 홍차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가뿐한 마음으로 나누어 주면 된다.
Interview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최예선
시간의 빈틈을
채우는 일
작가님 소개 부탁드려요.
문화예술 분야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어요. 《홍차, 느리게 매혹되다》와 《오늘은 홍차》를 통해 홍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에서는 예술 산보를 보여주었고, 《밤의 화가들》로 명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어요.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아요. 그림, 근대 건축물과 역사, 차와 소설.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좋아요.
요즘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요?
작년에 책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난겨울에 몸이 많이 아팠어요. 한동안 푹 쉬고, 작업실 이사도 했죠. 인생의 한 단계가 살짝 바뀐 느낌이에요. 더 가열차고 재미있게 쓰고 싶은 것을 준비하고 있어요. 요즘은 서울에 대한 수필을 담으려고 해요. 인물, 장소, 사건 등 다양한 것을 배경으로 여러 삶의 층위를 보여주고 싶어요.
소재가 대부분 홍차, 산보, 그림 감상, 여행 등에 관한 거예요. 문화와 여가의 교집합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쓰는 이야기가 여가와 맞닿아 있기는 해요. 힘겹고 빡빡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삶의 속도를 살짝 늦추고 놓친 것은 없는지 반추하는 시간을 주고 싶어요.
대부분의 직장인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그 자체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잠에서 깨야 해서인 경우가 많아요. ‘여유부족사회’에서 보이는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요.
누군가 그랬어요, 커피는 노동의 음료이고 차는 사교의 음료라고요. 차는 사람들에게 조금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티 테이블’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이 말이 참 좋아요. 하나의 테이블을 두고 그 위에 차와 관련된 도구와 장치를 두죠. 그리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도록,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꼭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같이 있으면 쉬는 느낌을 받죠.
프랑스 유학 시절, 홍차의 매력에 빠졌다고 들었어요. 조금 놀랐어요. 홍차 하면 영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유학하면서 느낀 건데, 영국과 프랑스는 차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요. 영국에 가면 홍차는 자국의 전통적인 문화이면서 귀족의 문화라고 생각해요. 서구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대상이라고 여기는 거죠. 거기서 비롯한 자부심도 무척 크고요. 시간의 층을 쌓아온 거예요. 프랑스는 차 자체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요. 찻잎은 프랑스 산지에서 난 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거잖아요. 이국으로 향한 모험심이나 향수가 배어있죠. 기본적인 정서가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찻집이 많아요. 찻잎의 산지와 최대한 비슷하게 차를 즐길 수 있도록 현지 사람이 직접 와서 차를 대접했던 기록도 있어요.
프랑스는 차를 통해 다름을 경험하고자 했던 거네요.
프랑스는 바다 건너 온 무언가를 접하는 기회로 차를 받아들인 거죠. 저도 홍차의 그 점을 무척 좋아해요. 소설도 비슷할 것 같은데요, 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나의 매개체가 되는 거죠. 홍차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영국으로 갔더라면 홍차를 좋아하게 된 지점이 또 달랐겠죠?
영국의 굳건한 전통으로 매력을 느꼈을 것 같아요.
보통 힘든 날에 맥주를 마시는 게 공식처럼 되어 있잖아요. 홍차의 위로는 어떻게 다를까요?
커피나 맥주도 종류가 다양하지만, 홍차는 직접적으로 ‘이 홍차와 저 홍차가 다르다’라고 누구나 느낄 수 있어요. ‘홍차가 이렇게 다양한 향이 있었어?’라고 놀랄 정도죠. 찻잎을 적절한 비율로 블렌딩을 하거나 여러 재료를 섞으면서 차 종류가 많아지거든요. 다른 음료에 비해 쉽게, 직접 해볼 수도 있고요. ‘차’라는 재료가 갖고 있는 식물과 꽃의 섬세함에서 비롯한 다정함을 향과 미세한 맛에서 느낄 수 있어요.
홍차의
따뜻한 목소리
홍차를 구분하는 방법이 궁금해요.
차를 구분하는 방법을 먼저 봐야 해요. 홍차는 많은 차 중에 하나거든요. 차는 발효도에 따라 나뉘어요. 백차, 녹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가 있죠. 흑차는 ‘보이차’를, 청차는 ‘우롱차’를 떠올리면 쉬워요. 홍차라고 하면 완전 발효된 찻잎을 말해요. ‘우리나라에선 홍차가 안 나요?’라고 묻는다면 물론 우리나라에도 차밭이 있어요. 그런데 홍차를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찻잎인 거죠. 중국 내륙 지역이나 인도에서 나는 찻잎은 잎사귀 크기가 커서 충분히 발효한 상태에서 마시는 게 맛있어요.
나라별, 지역별로도 나뉘네요?
중국에선 기문祁門과 운남雲南 지역이 유명하고, 케냐와 스리랑카에도 홍차 다원이 많아요. 다원이라면 차밭을 운영하는 농가를 말하죠. 이때 찻잎을 단일하게 쓸지, 블렌딩을 할지에 따라 또 맛이 달라져요. 와인도 어떤 지역에서 난 와인이냐, 어떤 공법을 들였느냐 등 세밀하게 들어갈수록 원재료를 쓴 게 순정적인 느낌이 들잖아요. 다즐링 홍차의 경우, 인도 다즐링 지역에 여러 개의 다원이 있지만 상태에 따라 등급별로 분류되어요.
홍차 애호가나 전문가 사이에서는 순도 높은 것의 가치가 더 높은가요?
그럼요. 요즘에 다즐링 첫물 차라고,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Darjeeling First Flush가 나오는 계절이거든요. 우리나라에 첫물 차, 두물 차가 있는 것처럼 다즐링의 순한 봄차가 있고, 여름에 거두는 여름차가 있어요. 두 가지 맛이 달라요. 봄에서 여름으로 살살 넘어갈 때 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이 좋죠. 구하기도 어렵고요.
차를 아는 게 생각보다 복잡한 것 같아요.
찻잎을 어떤 비율로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져요. 브랙퍼스트티는 아침에 마시기 좋게끔 여러 산지의 차들을 섞어요. 이런 종류를 블렌디드 티Blended tea라고 부르죠. 그리고 플레이버드 티Flavored tea라고 해서 향을 넣은 것이 있어요. 향이 나는 오일을 넣거나 허브와 꽃잎을 넣죠. 여기에는 단일 품종의 순도 높은 찻잎보다는 다른 것과 섞여도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는 보편적인 향을 주로 써요.
영국에는 차 마시는 시간마다 이름이 있더라고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미드 티 브렉Mid-tea break, 애프터 디너 티After-dinner tea, 나이트 티Night tea 등 차 마시는 게 일상으로 스민 것 같아요.
저도 꼭 시간을 정해서 마시는 것은 아닌데 작업실에 가면 일단 주전자에 물부터 끓이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어요. 그런데 희한한 게 마감이나 일이 너무 많아서 바쁘면 홍차가 잘 안 마셔져요. 체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건 꿀떡꿀떡 넘겨 마시는 게 아니라 쉬어가면서 마시는 거구나, 하고 느껴요. 일상의 의식 같은 거죠.
외국과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많이 다른가요?
우리나라도 전통적으로 차를 즐기는 민족이에요. 다원도 있고 명절마다 지내는 차례가 ‘차례茶禮’잖아요. 예전엔 술이 아니라 차를 올렸어요. 우리나라도 차에서 배제된 문화권은 아니에요. 그런데 음료는 음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음식과 어울리는 차들이 더 각광 받아요. 재미있는 건 홍차 문화가 낯설 수 있지만 이미 일상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차를 물 대신 마시고 있어요. 보리차를 생각해보세요. 곡물차도 많고요. 그게 우리 식문화와 가까운 음료인 거죠.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사람들이 선호해온 거예요. 차는 이미 우리 삶에 아주 가까이에 있어요. 우리 민족은 마시는 걸 굉장히 잘 즐기는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카페는 사교장 역할을 했어요. 사람들이 모여 각자 좋아하는 것을 마시며 안부를 묻고 특정 주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죠.
마시는 일 자체가 사람들이 한곳으로 자연스럽게 수렴하는 공간이 되는 것 같아요. 각자의 일상을 나누고 평상시의 누적된 피로도 풀면서요.
파리에서 미술사 전공을 하셨다고요. 실제로 수많은 그림 안에서 차 마시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해요.
역사의 굵직한 장면을 그린 그림의 배경으로 차가 많이 등장하죠. 미술사적으로 풀자면 옛날 자료는 다 그림이잖아요. 차제구나 차를 마시는 것 자체가 귀족적인 행위니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자 일부러 좋은 다기를 두고 그렸을 거예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요.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은 투박한 질그릇과 찻잔을 그렸어요. 그러면 여기서 쓰이는 찻잔이나 도구는 부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내밀하고 인상적인 삶을 반영한 소재가 되는 거예요.
홍차에 대한 오해도 있겠죠?
차에는 카페킨이나 폴리페놀 같은 몸에 좋은 성분이 물론 많지만 건강 음료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을 맹신해서 차로 무언가를 다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만 접근하면 홍차가 갖고 있는 이야기가 묻히기도 하고요. 생활에서 차를 마시는 게 하나의 튼튼한 단초는 될 수 있겠지만 차가 전부를 바꾸어 줄 거라는 믿음은 위험할 것 같아요.
영화와 홍차
짧은 담소
영화의 이미지를 홍차로 바꾸어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세 편의 영화 <어바웃 타임>, <미드나잇 인 파리>, <라라랜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이거 정말 고민 많았어요(웃음). 그렇지만 재미있는 미션이었어요. 영화의 이미지만 말하는 건 아니고 영화를 볼 때 마시기 좋은 홍차이기도 해요.
먼저 <어바웃 타임>은 어떤 홍차와 잘 어울릴까요? 영국 영화기도 해요.
<어바웃 타임>은 한 그루의 나무 같아요. 너른 벌판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떠올라요. 정확히는 침엽수림이요. 나무 하면 ‘내셔널 파크디파트먼트National Park Dept. 홍차’가 생각나요. 뉴욕에 있는 작은 차 부티크에서 파는 거예요. 꽃 향기가 나서 맑은 숲 향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실제로 침엽수림의 말린 나뭇잎이 들어있어요. 맛이 개운한데 그게 정말 가벼워서 개운한 게 아니라, 섬세하게 차곡차곡 쌓여 신선한 느낌이 들어요. <어바웃 타임>의 맑은 인상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사실 홍차보다 술이 많이 나오죠(웃음).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저 파리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파리가 그리워지는 영화죠. 바로 파리를 떠올릴 수 있는 홍차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파리 브랙퍼스트Paris Breakfast’를 가져왔어요. 시트러스 향이 나는데 끓이면 시트러스 향이 가라앉고 견과류 향이 나요. 그래서 홍차 특유의 고소함이 잘 나요. 밤의 영화와 아침의 홍차라고 볼 수 있겠죠? 과거의 어디론가 가는 거잖아요. 한밤의 꿈처럼 그 세계를 탐험하고 아침이 되었을 때 얼마나 복잡한 감정이 들까 싶었어요. 깨달음과 허무함 그리고 달콤함. 이 차를 아침에 마시면 좋을 것 같아요. 편안함과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라라랜드>에게는 어떤 홍차를 추천해주시겠어요?
첫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의 나를 뒤흔든 뜨거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죠. 이미 시간이 한참을 흐르고 나서도 그 음악을 듣자마자 그 시절로 가잖아요. 나를 그 시절로 데려다주는 영화라면,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먼저 생각났어요. 제가 홍차를 시작한 계기도 이 차예요. 홍차를 마시게 된 건 향수병 때문이었거든요. 파리로 공부하러 오기 전 잡지사에서 일했었어요. 크리스마스 시즌에 선물로 들어온 차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남은 차를 갖게 되었죠. 다 마시고 봄이 왔어요. 그 홍차가 무척 그립더라고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에 마시던 차잖아요. 비슷한 거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근처에 있는 리빙숍으로 갔어요. 향을 다 맡아보고 제일 비슷한 것을 골랐어요. 그게 이 홍차였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그리워했던 홍차는 이게 아니었어요. 웃기죠? 그건 ‘크리스마스 티Christmas tea’라는 홍차였어요. 생각해보면 홍차를 시작한 게 위로의 지점이라서 그런가 저도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마르코 폴로는 역사적 인물 아닌가요? 크리스마스 티와 내셔널 파크디파트먼트, 모두 이름이 독특해요.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쓴 사람이죠. 오리엔탈 향을 상상해서 만든 차예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방의 꽃 향을 느낄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블렌딩이 갖고 있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무척 많아요. 굉장히 시적이고, 홍차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해줘요.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Alexandra David Nell이라는 탐험가의 이름을 붙인 홍차도 있어요. 유럽에서 티베트와 라다크를 최초로 탐험한 여성이에요. 그녀에게 헌정된 홍차인 셈이죠. 이 차가 어떤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어떤 스토리를 중시하는지 알 수 있죠. 이미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재밌어요.
가장 좋아하는 홍차가 궁금해요.
다즐링이요. 다즐링의 세계는 무척 깊어서 한두 번 마셔서 다즐링을 잘 안다고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읽을 책이 많은 서가에 서는 기분이에요. 즐거운 기분을 주죠.
앞으로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가요?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서 공통으로 수렴된 것은 특정한 영역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나 시간, 장소 그리고 사람에 관한 거구나, 깨달았어요. 이런 소재를 확장시키고 이야기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어요. 노력할 거고요.
살롱 드 데지레Salon de Desi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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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