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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AT THE AIRPORT, AGAIN
다시 한번
공항에 가기
A DAY AT THE AIRPORT, AGAIN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에는 공항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공항에서 밥을 먹고 사람을 관찰하고 생각을 하며 글을 쓴다. 심지어 일주일 동안 공항에서 머무르며 책을 쓴 적도 있다. 집 앞의 단골 카페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공항에서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읽다 보면 공항에 가고 싶어진다. 그렇게 그의 글에 끌려 공항을 오간 것도 벌써 수년째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기사가 《어라운드》 2014년 2월호에 있다. 공항에서 쓴 일기였다. 몇 년이 흘렀고, 또 한 번 공항에서 쓴 일기를 이곳에 옮긴다.
PM 10:00
가끔 메일을 보내는 친구들이 있다. 문자 메시지도 손편지도 아닌 것이 메일은 애매하다. 애매한 매력이 있어 읽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즐거운 밤 보내고 잘 자고 있나요. 즐거운 밤이 외롭기도 했나요.” 오늘은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이 왔다. 누워서 메일을 읽다가 시계를 봤다.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몇 가지 물건을 챙겨 넣고, 신발을 신었다. 고양이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문을 닫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1층까지 내려왔는데 아차,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열어 며칠 전에 먹다 남은 소주를 물병에 담고 다시 한번 고양이에게 인사를 한다.
PM 11:35
다행스럽게도 공항철도가 끊기지 않은 시간이다. 몇 주 전부터 ‘조만간 공항에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네. 막차를 타고 갔다가 첫차를 타고 돌아와야지. 자리가 없어 창가에 서서 밖을 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이 보이고 친구가 보낸 메일의 인사를 다시금 생각한다. 즐거운 밤. 즐거운 밤. 즐거운 밤. 얼마 전에는 밤 산책을 하다 말고 메모를 했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나를 외롭게 하려고 서있을 때’ 모든 풍경이 멈춰있었다. 가로수도, 웃고 있는 사람들도, 달도, 무심한 간판들까지 정말 모든 것들이. 요즘은 외롭다고 말하는 게 수치심처럼 느껴지곤 한다. 20대의 언젠가는 외롭고 우울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이런 감정이 부끄러워진 걸 보니 마음이 노인이다. 지금 같은 칸에 있는 사람들은 지쳐 보이는데, 첫차의 사람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PM 11:31
공항으로 들어서는 무빙 벨트를 걷지 않고 서서 지나고 있다. 늦은 밤이라 불이 다 꺼지고 네온 사인만 켜져 있는데, 홍콩 같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거라면 빠른 걸음으로 지났겠지만, 밤새 공항에 머무를 거란 생각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니 굳이 걸을 필요가 없다. 천천히 지나는 무빙 벨트 위에 서서 요 며칠의 밤을 생각한다. 어제는 한강에 가서 춤을 추다 밤을 새웠고, 그제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밤을 새웠다. 시끄럽고 재미있는 밤을 지나왔고, 오늘은 조용한 밤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발아래를 보고 있는데 슬리퍼 사이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보인다. 다 벗겨진 페디큐어가 더럽다.
AM 00:11
좋아하는 자리는 4층에 있는데, 영업시간이 끝났다며 4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다 막아뒀다. 3층을 몇 바퀴 돌았다. 대부분 목베개나 담요를 두르고 잘 준비를 마친 듯하다. 걷고 걷다가 가장 끝 구석진 자리에 앉을 만한 곳을 찾았다. 창문 밖으로 어렴풋이 비행기가 보이는 곳이다. 가방에는 책도 있고, 일기장도 있고, 핸드폰도 있는데 어느 것도 꺼내기가 귀찮다. 첫차까지 다섯 시간이나 남았으니 다른 것들은 천천히 해도 되겠지, 싶다.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본다. 에어컨을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발이 차다. 보고 싶지 않은데 자꾸 발가락을 보게 된다.
AM 01:40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공항 2층으로 내려왔다. 여기도 춥기는 마찬가지다. 출출해서 뭘 좀 먹어볼까, 했는데 식당은 다 문을 닫았다. 편의점에서 물을 한 병 사고 먹을 것을 고른다. 바나나를 들어 올렸다가 ‘정말 배가 고픈 게 맞나.’ 생각하며 내려놓는다. 가끔 허한 마음과 배고픔을 구분 못 할 때가 있다. 가방 속의 소주가 생각나서 물만 한 병 샀다. 이번에는 2층의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집에서 갖고 온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물로 입을 헹군다. 소주는 얼마 전부터 마시기 시작했는데, 소주를 마시면 근사한 기분이 든다. 적당히 몸을 데우고 책을 읽는다.
AM 02:00
책의 어느 구절이 마음에 들어 핸드폰으로 찍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아가씨, 남의 짐을 왜 찍어요?” 고개를 들어 그녀가 눈짓하는 쪽을 보니 내 앞의 카트에 짐이 잔뜩 쌓여있다. 들고 있던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짐을 찍은 게 아니에요.”라고 작게 말하는데 아주머니는 이미 저 멀리 가서 일행에게 “별꼴이야.”라고 말하고 있다. 일행들이 모두 나를 보고,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읽던 책을 본다.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서럽다. 이런 건 일기로도 쓰고 싶지 않은데, 울고 있으니까 울고 있다고 쓸 수밖에. 서럽다.
AM 02:30
울고 나니 지쳐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공항철도는 끊겼지만, 리무진은 있을 거란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리무진도 새벽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다섯 시가 첫차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을 보고 밖의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아, 집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네. 바람이 시원하길래 음악을 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 음악만 듣는다. 아까의 울음이 아직 목과 가슴 사이에 남아있다. 사람도 몇 명 지나지 않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위에서는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가끔 공항 직원들이 순찰을 한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왔지만, 새벽의 공항은 너무 조용해서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조심스럽다. 발이 시려 치마 속으로 발을 감춘다. 내일은 꼭 페디큐어를 다시 발라야지. 살구색으로.
AM 04:00
글·사진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