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걸어도, 잠시 멈추어도 괜찮은 산책길

임진아
걷는 순간

느리게 걸어도, 잠시 멈추어도 괜찮은 산책길

6화 백화점 식품관

어딘가에 소속되어 어김없이 외출하고 어김없이 귀가하는 나날을 살던 때가 있었다. 프리랜서로 지낸 생활은 아직 그 시간의 길이를 넘지 못했다. 지금은 나에게 소속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온 일과 사람들을 맞이하고, 내가 받은 일을 완료하기 위해 나에게 집중하고,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쉬기 위해서 어떤 나를 저버리는 나날을 살고 있다.

회사원이던 때에만 존재했던 산책이 있다. 멍한 채로 오래 걷는 산책, 마음이 이끄는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산책, 정처 없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산책이었다. 그 산책들은 회사와 집 사이에 놓여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쓱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퇴근하는 모습 그대로 회사를 빠져나와서 집에 가는 길에 대형 백화점에 나를 들인다. 그날은 대체로 월급날이거나, 월급 다음 날이거나, 월급이 들어온 주의 금요일 저녁이었다. 백화점에 들어가면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는 듯이 그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서 이 도시를 사는 나의 산책길, 식품관으로 내려간다.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을 뜻한다. 식품관 산책은 모처럼 다른 걸 보는 시간이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곳이자, 천천히 걸어도 되는 산책이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작은 조각 케이크, 건강에 좋아 보이는 식사빵, 쌀 반죽으로 만들었다고 광고 중인 호두과자, 딱 한 번 먹기 좋은 각종 샐러드, 당장의 식욕을 돋우는 알록달록 김밥과 유부초밥, 각종 반찬들과 회. 그리고 제철을 챙기는 사람을 위해 그득하게 담긴 제철 과일들. 그것들을 잘 알아보기 위해서는 느리게 걸어야 하고, 잠시 멈추어 서서 자세히 보아도 된다.

한 바퀴 돌고 또 돌더라도 내 모습은 그저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성인 여성으로 보일 뿐이라는 게 백화점식품관 산책의 좋은 점이다. 와인 코너에 가서 와인 설명지를 읽고 있으면 저녁 테이블에 와인을 희망하는 사람이, 치즈 코너에서 추운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모처럼 작은 안줏거리를 챙기려는 사람이, 왠지 멋진 세제를 둘러보고 있으면 주말에는 보송보송한 이불 빨래를 하려는 사람이 된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 내가 나를 그렇게 볼 수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지쳐버리면 가장 먼저 나의 시간을 뭉개버리며 누워 쉬기 바빴으므로. 집과 회사에 없지만 생활에 놓일 수도 있는 반짝이는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모처럼 구경하는 일은, 도시인에게는 마땅히 건강을 위하는 일이다.

얼마 전, 우연히 산 책에 실린 작은 글을 읽고 묘한 안도를 느꼈다. 글은 1929년 8월에 쓴 글로, 약 90년전의 여름 풍경이었다. 저자는 더운 여름이면 백화점에 들어간다고 한다. 백화점 안을 찬찬히 걷고 있자면 드뷔시가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L’après-midi d’un faune’이 떠오른다고 말하며, 백화점은 자신에게 있어서 혹은 이 도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원이자 산책 공간이라는 것이다. 나는 왜 이 대목에서 마음을 놓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90년 뒤에도 어쩌면, 어떤 이는 내가 느꼈던 백화점 산책의 기쁨을 아주 똑같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건 아무리 애를 써도 90년뒤에 없을 나에게는 꽤 개운한 일이었다. 지금 느끼는 어떤 걱정은 어쩌면 이 지구에서는 언제라도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별거 아닌 존재가 되기에 마음이 이내 잠잠해진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과 백화점 식품관은 여전히 너무나도 어울린다. 드뷔시에게는 무척 유감이지만, 어쩌면 9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2022년에 사는 나도 여기가 나의 공원이자 산책길이에요.” 나는 90년 전, 한여름 오후의 백화점 산책에 대해 글을 쓴 작가에게 뒤늦은 답신을 보낸다. 그가 내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삶은 역시 허무하다고, 그래서 좋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이상하게 사람이 많은 주말에만 백화점을 찾는다. 평일에는 프리랜서로서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내가 정한 퇴근 시간에 대부분 곧장 집으로 향한다. 마음이 내키는 길로 골목길을 골라 걷는 퇴근길 산책이다. 백화점 산책길은 그 길에 놓여 있지 않다. 일을 마치고 평일 저녁에 가는 게 아닌, 오늘 기분 좋아지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백화점을 향해 집을 나선다. 이제는 멍하게 걷기보다는 평소보다 느리게 걷는, 고르는 척을 하는 게 아닌 잘 고르기 위해 멈추는 산책길이다.

공원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똑같이 도는 건 어째서인지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건 아마도 마음이 쓸쓸할 때 공원을 돌기 때문일지도요. 그럴 때면 백화점 식품관을 산책하면 좋아요. 몇 바퀴를 돌더라도 상관이 없고, 그런 나를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각 케이크를 보면 조금은 나아지더라고요. 마치 공원에서 열리는 멋진 마켓을 구경한다는 마음으로 뒷짐을 지고 걷다 보면 기분 좋아지는 걸 잔뜩 눈에 담은 사람이 될 거예요.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고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될 때, 백화점 산책길을 하며 100가지만큼이나 다양한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다 보면 어째서인지 자꾸 눈에 밟히는 어떤 것과 눈을 마주치게 될지도요.

임진아
읽고 그리는 삽화가. 생활하며 쓰는 에세이스트. 만화 풍의 생각을 쓰고 그립니다. 종이 위에 표현하는 일을 좋아하며, ‘임진아 페이퍼’라는 이름으로 지류를 선보입니다. 만화 에세이 《오늘의 단어》를 쓰고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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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임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