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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누구나 알고 아무도 모르는
시인 백석
네이버 지식인에 이런 질문이 있다. “시인 ‘백석’ 하면 떠오르는 게 뭐가 있을까요?” 한 사람이 답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요. 그리고 원빈 닮음.” 그렇다. 사실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일 것이다. 잘생긴 로맨티시스트 시인. 그런데 그거 아는가. 노년의 백석은 시가 아닌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불과 20여 년 전에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사람들 머릿속엔 백석은 청년으로 멈춰 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너머의 이야기다.
일본 청산학원 유학 시절 모습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윤동주이고, 한국 시인이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백석이란다. 마침 2014년 겨울쯤에 윤동주에 관한 기사를 썼으니 이번엔 시인이 사랑하는 시인에게 눈 돌릴 차례겠다. 백석, 그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당시 여느 집안처럼 가난했으나 교육에 열성적이던 아버지 덕분에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백석은 학창 시절부터 영어 회화에 능했고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문학적 재능이 발현된 건 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학업을 마치고 막상 할 일이 없던 백석은 방에 눌러앉아 글이나 썼다.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 모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 하나를 완성했는데, 그것이 덜컥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문학청년 송몽규가 그러했던 것처럼 19세라는 이른 나이에 작가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글쟁이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영어 교사가 되길 원했던 백석은 방응모의 도움을 받아 일본 청산학원의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틈틈이 시집을 읽는 것도 잊지 않았다. 4년 뒤, 조선으로 돌아온 백석은 더 이상 평안북도 출신의 촌뜨기가 아니었다. 화려한 근대 문물을 몸소 익힌 모던뽀이로 탄생한 것. 백석은 잠시 고향에 들른 후에 호화찬란한 네온사인과 재즈가 흐르는 경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학 생활을 지원해준 방응모가 《조선일보》의 편집자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잠시 영어 교사의 꿈을 접어두기로 했다.
“미스터 백석은 바루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쓰게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프로필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동상과 같이 아름답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서양화가 정현웅이 《문장》지에 쓴 글
정현웅이 서술한 것처럼 백석은 눈에 띄는 미남형이었다. 패션 감각도 좋고 지적이기까지 해서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다. 시집 《사슴》을 냈을 땐 문단의 관심도 한몸에 받았다. 100부 한정으로 출판된 시집은 인기였다. 시집을 구하지 못한 윤동주는 애끓어 하다가 학교 도서관에서 어렵게 찾아내어 필사할 정도였다고. 백석을 유난히 동경했다는 윤동주의 시에는 그에 대한 애정을 조각조각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시로는 <별 헤는 밤>이 있다.
“녹두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풍채는 나로 하여금 때때로 그 주위의 ‘몽파르나스’로 환각시킨다. 그렇건마는 며칠 전 어느 날 오후에 그의 시집 《사슴》을 받아 들고는 외모와는 너무나 딴판인 그의 육체의 또 다른 비밀에 부딪쳤을 때 나의 놀램은 오히려 당황에 가까운 것이었다. (중략) 온실 속의 고사리가 아니다. 표본실의 인조 사슴은 더군다나 아니다. 심산유곡의 영기를 그대로 감춘 한 마리의 ‘사슴’은 이미 시인의 품을 떠나서 달려가고 있다.”
–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실은 서평
1930년대 도시의 야경 | 출처 경성전기주식회사 화보
1937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 강의하던 시절 | 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림이 말한 ‘외모와는 딴판인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짐작건대 그 비밀은 시인의 토속적인 언어가 아니었을까. 두 줄짜리 단추가 달린 감색 양복에 광택 나는 가죽 구두를 신은 시인은 고향에 대하여, 산나물에 대하여, 승냥이에 대하여 시를 썼다. 그 상반된 모습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키고 그윽한 향수를 자아낸 것이다. 같은 시대의 시인 이상은 비상하고 독특한 언어로 주목받았다. 비록 미친 자의 낙서로 오인당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시로 보여주었다. 이상도 백석과 같이 울트라 모던의 대표 주자였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으로 속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봉두난발에 거친 수염이 있는 그는 누가 봐도 룸펜이나 미치광이처럼 보였단 말이다. 그런데 백석은?
나는 백석을 순박한 시골 소년의 이미지로만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퇴영적인 지식인으로도 보지 않지만…. 이십 대의 백석은 그저 변덕이 심했다. 약 2년간 《조선일보》 교정부와 출판부에서 일을 하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다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여자에 관해서도 그랬다. 옛날엔 여러 번의 혼사가 흔했다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두 번씩이나 결혼을 했다(이후엔 두 번 더 했다). 물론 그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은 있었다. 아직 봉건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부모가 더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백석은 연인을 사랑했지만 부모의 기대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사이에서 혼돈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서 있는 조선의 땅이 그런 처지였으니. 1930년대 조선은 화려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일본으로부터 맞지 않는 옷을 물려받은 것처럼, 아니 입혀진 것처럼 낯선 얼굴이 되어버렸다. 늘어만 가는 철길, 백화점, 카페 등 신식 문물이 조선의 맨 얼굴을 가렸다.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무관한 채로 덮인 근대화. 조선은 분명 균열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던 백석은 그 누구보다 실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 분열이 백석의 아름다운 시를 탄생케 했다. 경성에서 강제 결혼을 한 백석은 다시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 만주에서의 새 삶을 제안한다. 하지만 부모 곁을 떠나 이국의 땅에서 유랑자나 사회의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게 두려웠던 여인은 백석 몰래 짐을 꾸려 청진동으로 이사한다. 그게 백석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혼자 남겨진 백석은 함경도 산골에서 여러 편의 시를 쓴다. 그러고는 수소문 끝에 여인을 찾아내서 그중 한 편의 시를 보여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가난한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해서 눈이 날린다니…. 이쯤 되면 부러워서라도 그의 연인이 궁금할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영한, ‘자야’라는 백석이 지어준 아호가 있다. 알뜰한 체구에 고운 얼굴, 게다가 일본에서 유학 생활까지 했다. 그런데 백석의 부모는 이 완벽한 여자를 왜 반대했을까? 자야의 본래 직업은 기생이었다.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외삼촌의 사기 행각으로 가세가 기울자 기생의 길을 택했다. 백석을 만난 것도 함흥관이라는 요릿집에서 술 시중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자야와 백석은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다. 그러다 영원한 이별을 택했다. 부모의 반대도 있었지만 우선 나라의 정세가 좋지 못했다. 전쟁의 광기에 젖은 일본은 점점 더 집요한 방식으로 조선을 옥죄었다. 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언어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학인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일본어로 글을 쓰던가, 저항하던가. 백석은 일본어로 시를 쓰지 않았다. 차라리 침묵했다.
자야 여사가 운영하던 요정 대원각은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뒤 오늘날 길상사가 되었다.
해방이 되고 백석은 오산학교의 교장이었던 조만식의 통역 비서로 일하기 위해 평양으로 향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도 능통했기 때문에 소련군을 자주 만나야 하는 조만식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체제가 강화될수록 조만식과 백석의 삶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탁통치를 두고 김일성과 갈등하던 조만식은 어느 날 고려호텔에 감금되어서 생사불명이 됐다. 사건 이후 백석은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백석뿐만 아니라 문학계 전체가 쉬쉬할 때였다. 예술의 자율성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더 가면 숙청이었다.
백석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끝으로 어떤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나마 정치적 이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화시에 시선을 돌렸는데 그게 백석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아동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아동에게 사회사상을 강요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낸 게 발단. 여러 위원회의 편집위원이었던 그가 눈 밖에 난 건 순식간이었다.
1980년대 북에서 찍은 백석 가족사진
1958년 가을, 백석은 당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몇몇 예술가들을 생산 현장에 보내어 노동을 익히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당성이 약한 이들을 유배시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48세의 백석은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삼수군으로 파견됐다. 질 좋은 양복과 구두를 신고서 시를 쓰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이제 양의 새끼를 받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백석은 평양에 돌아가기 위해 여러 글을 썼다. 특히 <문학신문 편집국 앞>이라는 산문에서 “어찌 제가 당이 기대하는 붉은 작가로 단련되지 않겠습니까. 맡겨진 일에 힘과 마음 다하여 훌륭한 조합원이 되어 앞으로 좋은 글을 쓸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라고 각성의 표현을 드러냈다. 그 이후로 다시 평양의 부름을 받기도 하지만 지난번보다 더 큰 비난을 받을 뿐 이변은 없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문학인으로서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다. 1996년 1월, 37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삼수군에 있던 백석은 8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그게 남한에 알려진 전부다.
“원래 남편은 글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요. 삼수군으로 내려와 농장원으로 일했지만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어요. 남편은 도리깨질을 못해서 처녀애들에게 배웠을 정도였으며, 너무 창피해서 달밤에 혼자 김매기를 연습하기도 했지요.”
– 백석의 아내 리윤희의 증언
당연하게도 나는 말로의 백석에 대해 함부로 위로할 수도 단념할 수도 없다. 무척 단단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식민지 시대를 건너오면서 단 한 번도 일본어 시를 쓰지 않았던 시인은 해방이 되자 오지로 유배되어 농사를 배웠다. 문고리를 잡거나 악수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결벽증이 있던 그가, 참 오래도 농부로 지냈다. 그의 시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노년의 백석을 떠올리며 일몰의 정의에 대해 고민해본다. 저무는 해를 보며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오르는 어둠과 함께 무릎을 펴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는 아마 어둠과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백야와 같은 환한 어둠으로 한 시대에 머물다 갔을 것이다. 시인으로든 농부로든 최선을 다해.
백석, 그가 아니더라도 나를 과거로 반송시키는 인물은 더 있다. 에디터 일을 하는 동안 이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불러내는 글을 썼다. 이상, 김수영, 이중섭, 장욱진, 정기용, 윤동주, 송몽규···. 그들을 뭍으로 끄집어내면 낼수록 나는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시대에, 성장에, 상황에 마음을 대어보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기사를 쓸 때마다 싸구려 타임머신으로 여행하듯 흔들리는 기체에 매달려 과거와 현실을 오갔다. 서울의 길을 걸으며 모던뽀이와 모던껄이 거닐었을 경성 거리를 상상했고, 그 시대의 예술가들이 모였던 다방의 풍경을 상상했다. 밤이면 하숙집 단칸방에 앉아 시대를 앓는 문학청년을 상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일을 골라 하는 것일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어쩌면 나는 앞서 말한 인물을 통해 지금의 세태를 비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이야기지만 끝내 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들. 지금 우리가 아는 것, 그 모든 것을 진짜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완벽히 아는 건 없을 것이다. 어쩌다 그들의 일생의 일부 정도에만 발을 담근 거겠지. 하지만 ‘얼마나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뻔하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관심이다. 앞서 말한 시대에 일어난 일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과거의 일은 아니다. 우리가 자주 뒤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월이 쌓인 진실은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 금세 잊혀지고 만다. 과거의 등을 잡고 세워본다. 과거와 닮은 현실이 우리 앞에 있다.
글·사진 이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