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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윤종후ㅡ레몬서울
장난감 같은 CD 플레이어와 시나모롤 선풍기, 형형색색 빈티지 카메라. 나를 단숨에 매료시킨 이곳은 레트로 가젯 숍 레몬서울Lemon Seoul이다. 결함 있는 상품을 뜻하는 슬랭 ‘레몬’에서 이름을 따왔다. 레몬서울의 보라와 종후는 그런 물건들을 선별하고, 고치고, 매만져 새 주인을 찾아준다. 쇼룸에 들어서자 이들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물건들이 각자의 개성을 뽐낸다. 아, 이런 새콤함이라면 얼마든지 음미할 수 있겠다.
들어오자마자 탁 트인 창에 눈길이 가요. 심지어 경희궁이 보이네요.
보라 처음부터 이 동네에 쇼룸을 열고 싶었어요. 여기는 생각보다 평수가 작아서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었는데, 창밖으로 딱 궁이 보이자마자 1분 만에 “계약할게요!” 했어요(웃음).
창 앞에 턴테이블을 두었고요.
보라 여기가 12층이라서 창문을 열면 바람이 상쾌해요. 그 바람을 맞으면서 음악을 틀면 너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큰 액자처럼 창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새로 만들었어요. 저희끼리 있을 때 앞에 놓인 턴테이블로 좋아하는 음악을 자주 틀어요. 디제잉 연습을 하기도 하고요.
보라 씨의 첫 플레이어도 일본에서 구매한 턴테이블이라고 들었어요.
보라 맞아요. 흰색 베스탁스 포터블 턴테이블이에요. 전에 패션 브랜드를 운영할 때, 디자인 레퍼런스를 찾으려고 일본에 방문했다가 사게 됐어요. 바이닐을 한두 장씩 모으기 시작했을 때였죠. 포터블 모델이라 다른 기기를 연결할 필요도 없고 손잡이도 달려 있어 좋더라고요. 배터리만 있으면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어요. 연애 시절 잘 가지고 다녔는데요. 저희 집에 두고 쓰다가 남편 집에 놀러 갈 때 가져가서 같이 음악을 듣곤 했어요.
낭만적이에요(웃음). 두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났나요?
보라 한 파티 자리에서 지인 소개로 알게 됐어요. 저는 그때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다른 회사에서 VMD로 일하고 있었죠. 서로 취향이 잘 맞아서 같이 디자인이나 옷을 구경하고, 전시를 보고. 데이트가 대개 그런 식이었어요. 그러다 우리끼리 브랜드 하나 만들면 재밌을 것 같은 거예요. 한 시즌만 해보자고 조그맣게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다 입점이 됐죠. ‘그럼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어요.
즉흥적인 선택이었네요.
종후 레몬서울의 시작도 그랬어요. 그렇게 의류 브랜드를 5~6년 정도 하다가 잠깐 중단하고 ‘또 재미있는 거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거든요. 뭘 할지 고민하다가 제가 아내 몰래 모아두었던 빈티지 물건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사실 이런 게 있었어···.” 하고 하나씩 보여주면서요?
종후 네. 엄청 많았거든요(일동 웃음). 처음엔 아카이빙 목적으로 그 물건들을 한두 개씩 인스타그램에 올렸어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취미 그 자체에서 시작했군요. 자리 잡는 과정은 어땠어요?
보라 사실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이런 것도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런 것도 한번 소개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어긋나거나 부딪힐 일도 거의 없었어요. 철저하게 계획했던 비즈니스였다면 달랐을 수도 있지만요. 초창기 레몬서울은 취급하는 아이템 종류가 훨씬 다양했어요. 종후 님이 다방면으로 수집한 물건들의 절반 이상을 들여놨는데, 물건을 보러 오시는 분들이 붐박스와 워크맨 종류에 특히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손님들의 취향을 빠르게 반영해서 방향을 잡았어요. 그게 오픈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어요.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된 셈이죠.
종후 그렇죠. 행복한데 그만큼 괴롭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취미를 찾게 되는데요. 저 같은 경우 원래 건프라(건담 프라모델) 수집하는 것도 좋아했어요. 직접 조립하고 색칠도 하는 것으로요. 하지만 점점 바빠서 만들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어요. 최근에는 하츠네 미쿠에게 단단히 빠졌어요. ‘보컬로이드’를 통해 탄생한 가상 가수인데요. 사실 보컬로이드에 약간 거부감을 느끼는 쪽이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 어느새 침투해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일본 슈게이징 밴드 키노우에64도 하츠네 미쿠의 음성을 보컬로 썼어요. 한번 발 담갔다가 푹 빠졌습니다.
일에서 파생된 취미를 만든다는 말이 듣기 좋아요. 보라 씨도 최근에 생긴 취미가 있어요?
보라 저는 요즘 일과가 끝나면 항상 영화 한 편을 보고 잠들어요. 옛날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거예요. 재미있는 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렸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영화 속 디테일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특히 집이나 방이 배경으로 나오면 저도 모르게 소품들을 자세히 보게 돼요. ‘저 모델이 저기 있네.’, ‘이 시대에 등장할 물건이 아닌데 왜 여기 뒀지?’ 하는 식으로 숨은그림찾기처럼 물건을 찾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찾으려 하지 않아도 자꾸 보여요.
두 분이 어떤 어린이였는지도 궁금해요. 이번 호 주제가 ‘음반’인데요. 음반에 관해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종후 중학생 때 세뱃돈을 모아서 혼자 CD 플레이어를 사러 갔어요. 그때는 용산 전자상가에 직접 가야만 그런 기기를 구할 수 있었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한 가게 사장님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머리가 긴 데다가 왠지 록 음악을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제가 그 당시 록을 굉장히 즐겨 들었거든요. 역시나 원하는 플레이어를 샀는데도 사장님이랑 한 시간 넘게 음악 얘기를 했어요. 그러다 좋은 음반을 추천해 주시겠다며 저를 데리고 ‘신나라 레코드’라는 매장에 갔는데요. 그때 구매한 음반이 캐서드럴이라는 영국 메탈 밴드의 음반이었어요. 커버가 아주 괴상해요. 보실래요?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준다.)
정말··· 독특해요(웃음).
종후 열다섯 살 아이에게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이걸 사서 들은 중학생이 이렇게 컸습니다(웃음).
보라 씨는 어때요?
보라 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릴 테이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던 거실이 생각나요. 집에서 TV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쭉이요. 저희 집 거실에는 벽 한쪽을 꽉 채울 정도로 큰 나무 장이 있었어요. 바이닐, 턴테이블, 스피커 같은 오디오 기기와 음반들로 채워진 장이었죠. 아버지가 그런 걸 수집하셨거든요. 어릴 때는 학교 마치고 집에 와도 아직 해 지기 전이잖아요. 그 시간에 항상 릴 테이프가 돌아가던 기억이 나요.
행운아였는걸요.
보라 그러니까요. 그때는 너무 당연해서 그게 특별한지 몰랐어요. 모두가 그런 집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죠.
두 분 모두 음반과 밀접한 어린 시절을 보냈네요. 그렇다면 처음 구매한 앨범도 기억나요?
보라 밴드 9와 숫자들 앨범이었어요. 함께 레코드 숍에 갔던 지인이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가 작업한 커버라고 하길래 디자인만 보고 샀죠. 나중에 들어보니 음악도 물론 좋았고요. 그 디자이너가 이재민 님인데, 레몬서울 초창기에 방문하셨던 분 중 하나예요. 그분 제안으로 전시도 하게 됐고요. 제 첫 음반에서 시작해 지금은 소중한 인연이 됐어요.
종후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매진Imagine》이라는 컬처 잡지가 있었어요. 창간호를 사 읽었는데, 마침 밴드 메탈리카의 [Load] 발매 인터뷰가 실려 있었죠. 어린 제 눈에 정말 멋졌어요. 선글라스 낀 형들이 막 포즈 잡고 있으니까요. 그 길로 당장 음반 가게에 달려갔던 기억이 나요. 근데 솔직히 열세 살이 뭘 알겠어요? 집에서 틀어놓고 맨날 잠이나 잤어요.
이곳에도 음반들이 많은데요. 두 분의 과거 인터뷰를 읽다가 궁금했던 일화가 있어요. 어떤 분이 바닥에 누워 있다가 간 적도 있다면서요?
보라 아, 맞아요. 밴드 소속 뮤지션 분이었는데, 여기가 꼭 천국 같다면서 너무 좋아해 주셨어요. 하룻밤만 자고 가고 싶다고 말하시더니 대뜸 바닥에 드러누웠죠. 누군가는 당황스럽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그렇게 표현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종후 그리고 청음 하다가 춤을 추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때마다 깜짝 놀라요.
보라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는 저희까지 행복해져요.
바로 그런 감각을 레몬서울이 손님들에게 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요.
보라 맞아요. 그리고 그런 감각은 실제로 와서 보고 들어야만 느낄 수 있어요. 요새는 모든 정보를 온라인에서 미리 찾아보잖아요. 여행을 갈 때만 해도 그렇죠. 식당이나 볼거리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과정은 즐겁지만, 저 같은 경우 막상 그렇게 찾아보고 가면 설렘이 덜하더라고요. 남의 여행을 따라하는 기분도 들고요. 우연히 발견한 곳에 갔을 때가 더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래서 레몬서울은 오늘처럼 인터뷰할 때 제외하고는 내부 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요. 저희가 바라는 건 직접 와서 이곳을 만끽하고 영감을 얻어가는 거예요. ‘오늘은 또 어떤 보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와 주시면 좋겠어요.
보물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려요. 빈티지 제품이 보물이 되도록 다듬는 것 역시 두 분의 역할이죠.
종후 레트로라는 게 물건이 아니라 마음 같아요. 녹슬지 않는 마음. 손님들이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하려고 수입하는 물건들을 최대한 깨끗하게 수리하고, 정비하고 있어요. 물건은 결국 그걸 쓴 사람을 닮거든요. 고치다 보면 그게 보여요.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빨리 감기 버튼, 되감기 버튼이 하도 많이 눌려 닳아 있거나 고장이 나 있으면 성격 급한 주인이었겠거니 해요.
프로파일러 같아요.
종후 그런 셈이죠. 또 포터블 기기도 자주 만지게 되는데 대부분 야외 활동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서 그런지 엄청 험하게 다룬 게 느껴져요. 이름값 하듯 여기저기 많이 다녔나 봐요. 낡고 상처 난 기기들을 보면 조금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요.
보라 40~50년 전 물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아요. 그만큼 컨디션이 좋은 것들 위주로 수집하려고 해요. 이전 주인이 그만큼 소중히 다뤘다는 증표거든요. 그래서인지 다음 주인을 만나도 정말 소중히 여기시더라고요.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 저희와 같은 마음인 사람에게 가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요.
세컨핸드Second-hand를 ‘프리-러브드Pre-loved’라고도 부른대요. 모든 중고는 사랑받은 적 있는 물건이라는 거죠.
보라 프리-러브드! 그렇게도 말할 수 있군요.
그래서 마음이 연결될 수밖에 없나 봐요.
보라 요새는 옷도, 전자 기기도 자주 바꾸잖아요. 그런데도 수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 물건을 진짜 아끼는 사람에게 계속 연결된다는 게 좋아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데요. 예전에 한 손님이 붐박스를 메고 오셨는데, 아무리 봐도 붐박스가 낯이 익은 거예요. 새빨간 색에서 오렌지빛으로 변색이 된 것까지 저희가 몇 년 전에 판매하던 것과 똑같았죠. 알고 보니 처음 사 간 손님의 친구분이었어요. 그 손님에게 되사서 잘 쓰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가 가장 바라던 것, 물건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보다니. 정말 보람찼어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신기한 우연들이 발생하죠.
보라 또, 물건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분이 플레이어를 구매하셨는데, 막상 집에 가져가보니 크기가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가져오시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얼마 뒤에 그 물건을 간절히 원했던 다른 분이 나타나요. 매장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집에서는 작동이 잘 안된다며 “너무 마음에 들고 예쁜데, 아무래도 제 물건은 아닌가 봐요.” 하셨던 분도 있었어요. 그건 또 다른 주인을 만났고요. 가끔 이렇게 비과학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두 분은 우연의 힘을 믿는 편이에요?
보라 네.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시는 영화 굿즈 협업도 우연한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종후 예를 들어 자주 가는 함박스테이크 가게 사장님 덕분에 〈블루 자이언트〉(2023) 협업을 하게 된 경우가 있어요. 알고 보니 그 가게의 또 다른 단골이 영화사 분이었던 거예요.
보라 이번 〈해피엔드〉(2024) 리믹스 앨범에 참여해 주신 뮤지션 낸시보이 님도 비슷한 계기였어요. 같은 동네에 사는데, 단골 맥줏집에서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게 됐죠. 그 영화 좋아한다고 하셔서 곧바로 “리믹스 앨범 같이 해보실래요?” 했어요.
저도 그 영화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번에 레몬서울에서 판매한 사운드트랙 앨범도 주문했어요.
보라 앗, 정말요(웃음)? 개봉 첫날 영화관에서 그걸 보는데 협업 아이디어가 막 떠올라서 집중을 하나도 못 했어요. 끝나자마자 영화사에 연락했죠. 레몬서울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에게 저희가 좋아하는 걸 알리고 싶어요. 그게 이런 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이유예요.
그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시간이 흘러도 지키고 싶은 레몬서울의 중심축이 있다면 무엇이에요?
보라 계속 새롭고 멋진 디자인의 물건을 보여주는 거요. 다른 멋있는 대답도 있겠지만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햇수로 거의 7년째 운영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저희가 디깅할 수 있는 범위는 좁아질 거예요. 그럼에도 더 깊게 파서 우리도 몰랐던 재밌는 것들을 소개하고 싶어요.
종후 저는 브랜드는 항상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님들이 좋아하는 걸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걸 따라잡아야 해요. 반대로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건 사람, 즉 저희 둘의 마음이겠죠.
1980년에 발매된 음성 변조 스피커. 열두 가지 효과음이 내장되어 있으며 마이크에 대고 목소리를 녹음하면 즉석에서 음성을 바꿀 수 있다.
종후가 꼭 보여주고 싶다며 서랍을 열어 꺼낸 것. G.M.O. 레코드에서 발매한 일본판 바이닐로, 약 10년 동안 모은 그의 음반 컬렉션 중 하나다. 허드슨 소프트의 초기 게임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다.
닌텐도 게임들을 ‘클리어’하면 볼 수 있는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을 모아놓은 컴필레이션 앨범. 닌텐도 클럽 포인트로 응모해야 얻을 수 있었던 비매품이다.
소니가 1998년에 출시한 둥근 콩 모양 디자인의 카세트 플레이어. 모델명은 WM-EQ9이지만 빈즈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에디터 정지윤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