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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도시와 점점 친해졌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까로Carro’를 산 것이다. 이곳에서는 차를 타고 마트에 가거나 집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이 거의 없어 대부분 까로라고 부르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시장에 간다. 그래서 까로는 이방인을 현지인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까로를 끌고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길 위를 걸으며 나는 이 도시와 점점 친해졌다.
남편의 꿈은 요리사
끊임없이 스스로 묻는 버릇이 있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을 했다고 해서, 장래 희망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에게 엄마는 제발 하나만 제대로 하라며 타박 하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떻게 하나. 지금도 나는 말할 수 없는 몇 가지 ‘장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편에게 물었다.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어?” 그는 예상외의 대답을 했다. “요리를 하고 싶어.” 남편은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두 손 가득 장 봐오는 걸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회사 일이 바쁘면 바쁠수록 더 정성껏 요리했다. 요리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이렇게 금방 먹어버리는 걸, 오랜 시간 수고를 들여 만들어야 한다니 참으로 요리는 귀찮은 거야.’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곤 하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이런 남편이라 해도 요리를 배우고, 식당을 하고 싶다는 대답은 대단히 의외였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인생의 선택지.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가능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 그럼 요리를 하자. 하면 되지.” 남편은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아, 내가 요리사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르겠다. 질문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있다. 처음 질문을 한 지 몇 년이 지났고, 남편은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요리 학교에 다니고 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는 깜짝 놀라곤 한다. “아, 우리 유럽에 사는구나.” 자꾸 묻다가,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보케리아 시장에서
현지인도 장을 보나요?
낯선 나라에서 사는 일은, 낯선 시장에서 장을 보는 일. 그리고 낯선 재료로 밥을 해먹는 일이다. 이곳에서도 장 보기는 남편의 몫이다. 스페인은 유럽 중에서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라 어느 도시에 가든 물건은 싱싱하고 사람들은 활기차다. 게다가 해산물과 고기 등 기본 식재료가 저렴하고 치즈, 올리브, 안초비, 아스파라거스 등 한국에서는 가격이 만만찮아 사기 어려운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남자, 신이 났다. 저녁 한 끼를 먹으려고 해도 여러 군데에서 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생선은 카타리나 시장Mercat de Santa Catarina이지.”, “역시 마늘은 보케리아 시장Mercat de la Boqueria 마늘이 제일 좋아.” 이 역시 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인 보케리아 시장은 ‘여기 없으면, 유럽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식재료를 파는 곳이다. 워낙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갈 때마다 인파에 치여 아무래도 자주 찾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물건은 아주 훌륭해서 한 달에 두세 번은 들르곤 한다. 조금만 살피면 관광객들 틈에서 현지인들이 줄을 서 있는 가게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가게들은 대부분 한 두 가지 식재료만 전문으로 판매한다. 오로지 달걀만 파는 가게도 있고, 치즈나 통조림만 모아두고 판매하는 곳도 있다.
채소나 생선은
산타 카타리나 시장
제일 자주 장을 보러 가는 곳은 집 근처의 재래시장인 산타 카타리나 시장이다. 보케리아에 비하면 규모는 소박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주로 오는 시장이라 진열된 식재료나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보면 여기 사람들이 뭘 먹고 사는지 알 수 있어서 좋다. 이곳에는 수십 종류의 토마토를 파는 과일 가게도 있고, 하몽과 소시지만 파는 가게, 손질하여 얼려둔 해산물만 파는 가게도 있다. 우리는 생선이나 새우, 소고기, 돼지고기 등을 주로 사는데 어느 가게나 물건을 사면 누런 이면지에 한 번 감싼 후, 얇은 비닐봉지에 한 번 더 담아준다. “생선을 살 때는 먼저 사전을 찾아보고 가야 해. 어떤 요리를 할지 미리 정한 다음에, 그에 맞는 손질법을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는지 찾아보는 거지. 한 명 한 명 원하는 대로 손질을 해주는 탓에 손님이 많을 때는 대기표를 손에 들고 20~30분씩 기다릴 때도 있지만, 재미있어. 사람들이 어떤 생선을 먹고 어떻게 손질하는지 보면서 그 날 집마다 저녁의 식탁을 상상해보는 거지. 그러다 오늘 뭐 먹을지 힌트를 얻기도 하고.”
쌀은 보통 집 근처 견과류 가게에서 산다. 동네 사람들이 줄 서서 장을 보는 보통의 작은 상점. 이제는 익숙해져 그저 평범한 동네 가게 중 하나가 되었지만, 처음 이곳을 발견하고 쌀을 사던 날 실은 많이 설렜다. 얇은 비닐봉지에 쌀을 담아 집에 오던 길, ‘우리가 이 유럽의 낯선 도시 동네 사람이 되었구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곳에서는 쌀과 아몬드, 호두 등 견과류뿐 아니라 밀가루 등 베이킹 재료와 말린 과일 등도 함께 판매하는데, 우선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아야한다. 아무리 급해도 내 차례가 오기 전에는 물건을 살 수 없다. “쌀 오백 그램, 찹쌀 삼백 그램, 그리고 말린 망고랑 파인애플도 백 그램 씩 주세요.”,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아, 호두도 백 그램만 주시고요.” 이곳에 갈 때는 늘 느긋하게 시간을 잡고 간다. 견과류와 쌀 그리고 말린 과일 냄새가 섞여나는 고소하고 거친 향을 맡으며 보내는 그곳에서의 시간이 좋다.
스패니시 파스타
우리가 요즘 가장 자주 해 먹는 음식은 보케리아 시장에서 산 올리브와 마늘, 산타 카타리나 시장에서 산 아스파라거스와 안초비를 듬뿍 넣은 올리브 오일 파스타. 어느 날 냉장고 속에 있던 이런 흔한 재료를 가지고 파스타를 해먹다가, ‘아, 이 한 그릇이 그대로 스페인이구나. 언젠가 이 맛이 몹시 그리워질 날이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사뭇 비장하게 결심했다. 이곳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먹자. ‘스패니시 파스타’라고 마음대로 이름도 지어 붙였다. 지겹도록 먹어야지. 그래야지.
이 글을 쓰다가 올리브와 아스파라거스, 안초비를 넣고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두른 ‘스패니시 파스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는데,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지금 당장 냉장고를 열면 간단히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이 파스타가 몹시 그립다. 가끔 이렇게 미리 그리운 것들이 있다. 스패니시 파스타를 그리워하다 보면 보케리아 시장, 카타리나 시장, 견과류 가게 그리고 동네 마트가 연이어 떠오르겠지. 시장과 시장 사이를 잇는 좁고 복잡한 울퉁불퉁한 골목길도 함께.
에디터 이현아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