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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마을
어릴 땐 집에서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집에 있는 쪽이 안전하다고 느껴서인지 친구랑 잘 어울리다가도 해가 지려고 할 즈음이면 군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더 놀겠다고 떼를 쓰거나 친구 집에 가겠다며 내일을 기대하는 일은 잘 없었다. 생일이 아니고서야 사람들과 북적거리며 어울릴 일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 시절 외롭다거나 심심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형제가 없는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들이를 가거나 잠들기 전에 양쪽에서 엄마 팔을 잡아당기며 “내 거야!!” 하고 피붙이와 다툴 일은 없었고, 엄마는 엄마 그대로 언제나 내 차지였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엄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마마걸이 됐을 텐데 다행히 그 직전까지는 성숙했던지 딱히 남 부끄러울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딱 그 나이대 어린애만큼 미성숙한 면도 분명히 있었기에 잠깐이라도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을 좀체 견디질 못했다. 이를테면, 엄마가 5분 거리 슈퍼마켓에 다녀온다고 슬쩍 운을 떼면 세상 모르게 책을 읽다가도 현관으로 달려와 신발장 모서리를 붙잡고 울었다. 혼자 있는 게 특별히 무서웠던 것도 아니고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긴 것도 아닌데 그냥 싫었다. 아마 내가 진짜 싫던 건 ‘집에 혼자 있다.’는 낯선 감각이었겠지.
그러다 머리가 조금 자라 초등학생이 됐을 무렵엔 엄마가 잠깐씩 외출하는 것에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다. 약간 싫은 기분이야 있었지만 전처럼 신발장 모서리를 잡고 우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은행이니 마트니 화실이니 볼일이 생기는 날이면 등교하는 나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오늘은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없을 수도 있어. 그럼 우유 구멍에 손 뻗어봐. 혹시 손에 안 닿으면 휘휘 저어봐.” 엄마의 미션을 수행하며 열쇠를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나에게 고양감을 주었다. ‘이제 혼자 집에 있을 수 있다!’는 뿌듯함으로 어깨에 힘을 주고 있다 보면 엄마는 금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난 턱을 슬쩍 추켜들고 집에서 뭘 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고작 30분, 길어야 한 시간 정도 집을 지켰을 뿐인데 마치 대단한 일을 해낸 영웅처럼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빈집을 지키던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놀러 오라는 전화였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엄마처럼 우유 구멍에 열쇠를 두기로 했다. 눈대중으로 거리를 짐작해 열쇠를 두고 바깥에서 동그란 우유 구멍을 열고 손을 넣어 휘휘 저어보았다. 이 정도 거리라면 엄마 손도 틀림없이 닿을 거라 생각하면서 공책을 한 장 뜯어 글자를 적었다. “엄마, 우유 구멍에 열쇠 있어. 나 친구네 갔다 올게.” 현관 바깥에 종이를 붙이고 친구네서 신나게 놀고 돌아오는 길엔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 발걸음이 가벼웠다. “주연이 다 컸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웬걸, 내가 예상한 공기와는 그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우유 구멍에 열쇠가 있다는 종이를 바깥에다 붙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종이를 안에 두든 바깥에 두든, 이웃이 알게 된다 한들 우유 구멍 너머에 열쇠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악에 그토록 무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은 15층짜리 아파트의 1층이었고 엘리베이터를 오가는 사람만 해도 십수 명, 수십 명은 됐을 텐데도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 추호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 우유 구멍이 있던 시절엔 세상에 별일이랄 게 없었다. 큰일은 정말 별스럽거나 충격적인 것이어서 도시 괴담처럼 드문드문 들려올 뿐이었다. 우유 구멍으로 기다란 막대를 넣어 문을 따는 범죄 수법이 횡행하자 우유 구멍을 막다 못해 없애버리게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작은 구멍을 통해 바닥에 놓인 열쇠나 방공호 일부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런 이유로 사라져버린다는 건 적잖이 억울한 일이었다. 우유 구멍에 열쇠를 놓고 외출한다고 동네방네 소문 내고도 아무 일 없던 나로서는 억울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나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우유 구멍을 열어 열쇠가 있는 걸 확인하고, 구멍 틈으로 손을 뻗어 그걸 건져내는 일에서 고양감을 느낄 것만 같은데 우유 구멍 같은 건 이제 어디에도 없다.
어린 시절엔 쪼그려 앉거나 엎드려서 포터블 카세트에 자주 속삭이곤 했다. 무슨 이야긴고 하니, 해가 중천에서 내려갈 무렵이면 엄마는 내 일과를 받아 적을 채비를 했다. 어떤 일과를 기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치원에 다녀왔고, 선생님이랑 리코더를 불었고, 엄마랑 칸쵸를 먹었고,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를 읽었고, 수프 먹으면서 <피구왕 통키>를 봤고… 같은 어린아이의 일상이었겠지 싶다. 엄마는 그런 이야기들을 어여쁜 필체로 자투리 종이에 적었다. 매일 오후 내게로 도착하던 일기 같은 쪽지는 나를 위한 일종의 대본이었다.
엄마는 어린 내 몸통만 한 포터블 카세트로 라디오를 참 자주 들었다. 나는 그 안에서 많은 어른을 만났다. 그들은 목소리의 높낮이를 바꿔가며 사연을 읽거나 음악을 들려주었다. 아침엔 지적이고 잠잠한 목소리가, 낮에는 활기 있고 발랄한 목소리가, 저녁에는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밤에는 고요로 침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요리할 때도, 가계부 쓸 때도, 씻을 때도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가 꺼지는 경우는 책을 읽거나 내가 쪽지를 대본 삼아 읽을 때 정도였다. 엄마는 대본이 완성되면, 집에 즐비한 가요 테이프 중 이제는 잘 듣지 않는 걸 하나 꺼내 포터블 카세트에 끼웠다. 엄마가 손짓하면 나는 그 앞으로 가 쪼그려 앉았고 엄마는 라디오 모드를 테이프 모드로 바꾸고 버튼 누를 준비를 했다. 빨간 버튼과 까만 버튼을 동시에 누르기 위해 검지와 중지를 뻗던 장면이, 지금도 당장 일어난 일처럼 뇌리에 선하다. 버튼을 누르기 전에 엄마는 “하나, 둘, 셋!” 수를 셌고, 버튼이 ‘딸깍’ 하고 눌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아빠 안녕. 나는 오늘 유치원에 갔어. 아침에 비가 와서 찝찝했어. 발이 젖는 거 싫어. 우산은 좋아. 오늘은 간식으로 칸쵸를 먹었어. 집에 와서 엄마랑 마당에 나갔어. 사진도 찍고, 필름 집에도 갔다 왔어. 슈퍼마켓에서 꼬마곰 젤리도 샀어. 아빠 언제 와? 빨리 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던 이야기는 이 정도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꼬박꼬박, 아빠가 출근한 날이면 테이프에 내 목소리를 녹음했고, 아빠가 돌아오면 그걸 들려주었다. 가끔은 “둘, 셋!” 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버튼 누를 타이밍을 놓쳐 “다시! 다시!” 하는 목소리가 녹음되기도 했다. 소독하는 아주머니가 오시면 초인종 소리가 들어가기도 했는데, 엄마는 녹음 버튼을 누르기 전엔 늘 티브이도 끄고, 라디오도 끄고, 고요한 상태에서 수를 세주었기 때문에 대체로 깨끗한 목소리가 녹음되곤 했다. 녹음이 잘되었는지 테이프를 되감기해 내 목소리를 들어볼 때면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가끔은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가 엉키기도 했다. 그럼 두 구멍 사이에 연필을 넣어 돌돌 감았다. 때로는 포터블 카세트 안에서 테이프가 끊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땐 잘린 부분을 투명 테이프로 살짝 붙여주면 감쪽같아진다는 걸 엄마한테 배웠다. 나는 그런 기술을 일찍 알게 된 덕에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테이프를 듣다가 고장이 나면 손쉽게 고쳤고,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얼른 공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누르는 학생으로 자라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카세트 플레이어로 테이프를 듣는다. 이제는 테이프가 풀리거나 끊어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목소리를 테이프로 녹음하는 일은 더더욱 없지만 카세트 버튼을 누를 때면 포터블 카세트 앞에 웅크려 앉아 대본 읽던 채비를 하던 시간이 절로 떠오른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호그와트(마법 학교) 교장 선생인 덤블도어가 ‘펜시브’를 사용하는 장면이 있다. 관자놀이에 지팡이를 대고 기억을 꺼내 돌로 만들어진 대야(펜시브)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옛 기억을 살펴보는 것인데, 어쩌면 호그와트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지팡이가 없어도, 특별한 주문을 몰라도, 펜시브가 없어도 어떤 추억은 마법보다 강력해서 필요한 순간 튀어나와 나를 지켜주거나 구성하는 게 아닐까 하고.
웬만하면 좋은 쪽을 보자고 다짐하고, 나쁜 일이 생겨도 전화위복을 마음에 새기곤 하지만 “럭키비키!”를 따라 외친다 한들 매일 긍정적인 기운이 나고 씩씩한 채로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크고 작은 일로 용기를 잃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불쑥 찾아오는 날도 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울적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일종의 방어막처럼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던 좋은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것은 성격이나 성정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일머리에 관한 것일 때도 있고, 옷차림이나 말투에 관한 것일 때도 있다. 칭찬받을 때 “아니에요.”라는 말로 부러 겸손해지진 말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 적 있지만 칭찬 속에 서 있는 나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용기를 얻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므로 나는 왕왕 누군가가 건넨 칭찬의 말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네가 정말 나니?” 묻고, 찬찬히 채워지는 용기를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집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두툼한 파일들은 내게 용기 덩어리와도 같다. 오래돼 낡고 해진 파일은 벨벳 소재로 삼면을 지퍼로 여닫는 형태다. 그 안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받아온 누런 상장과 성적표, 학교생활기록부가 세월을 머금고 차곡차곡 쌓여 있다. 먼지 알레르기 때문에 열린 수도꼭지처럼 콧물을 흘릴 걸 알면서도 가끔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 읽는다. 키가 121cm에서 132.4cm가 되고, 19kg였다가 24kg으로 훌쩍 살찌는 동안 나를 관찰해 온 선생님이 적어주신 문장들을. 그것들은 내 것 같으면서도 내 것이 아닌 것도 같은데, 유체 이탈하듯 내 몸 바깥에서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고, 실은 꽤 즐겁다. “사고력이 풍부하여 짓기에 관심이 많고 문학 방면에 소질이 있어 열심히 노력함.”이라든지 “원고지 쓰는 요령에 맞게 글을 잘 씁니다.”라는 문장은 직업인으로서의 나에게 큰 용기가 된다. 몇 번쯤 곱씹어 읽다 보면 ‘잘했었구나’, ‘잘해왔구나’가 용기를 입어 ‘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로 번져가기도 한다. 나다운 기록과 나였으면 좋겠다 싶은 문장 사이를 헤매던 어느 날엔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재채기와 함께 뜻밖의 이야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수예부. 십자수의 기본 방법을 잘 이해하며 다양한 모양을 완성합니다.” 수예부…라니? 지금도 간간이 천 조각을 가지고 주머니 파우치니 이름 자수니 하는 것들을 즐기지만 그건 다 커서 처음 가져본 취미 아니던가. 내가 언제 수예부라는 걸 해보았단 말인가.
비뚤배뚤하게 조립한 천 조각을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마다 내가 진짜 선물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흡한 실력을 뽐내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닌데 기어이 선물하고야 마는 뻔뻔함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느 해인가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접했다. “뜨개질이라는 게, 공기도 같이 뜨는 거라고 하죠?” 그렇구나, 내가 보내고 싶던 건 엉성한 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취향을 생각하며 천 조각을 고르고, 그 누군가를 생각하며 꿰매던 시간이었구나. 대단한 걸 발견했다며 기뻐했는데 초등학생 때 이미 그런 비슷한 것들을 하고 있었다고? 엄마에게 물어봐도 “수예?” 하고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도려내어 깔끔하게 꿰맨 것처럼 사라진 1년여의 기억. 기록이라는 것은 그리운 것을 생생하게 불러내기도 하고, 어렴풋한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사실을 얼렁뚱땅 왜곡해 버리기도 하고, 사라진 것들을, 기억에 없는 것들을 현실로 불러오기도 한다. 마치 수예라는 단어가 불현듯 내 인생에 뚝 떨어진 것처럼. 나는 그 숱한 기록 사이를 헤매며 내가 아는 나와 내가 잊어버린 나를 잇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 같다. 좋은 것들을 짜깁기해 만들어낸 나의 모습을 든든한 용병처럼 숨겨두고 용기를 잃을 때면 득달같이 꺼내 나 좀 다독여달라 채근하기 위해. 오늘도 어떤 칭찬들을 나만의 주머니에 담아 꽉 동여맨다. ‘수예’처럼 어디론가 도망가지 않도록, 좋은 것들은 애써 붙들자고 생각하면서
글 이주연(산책방)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