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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광기의 왕국>, <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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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지 않고, 우직하게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티브 잡스는 각자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다.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를 했고 스티브 잡스는 죽었으니 최고였다고 해야겠지. 최고임과 동시에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인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친구가 물었다. “요즘 무슨 고민 없니?” 내게 무슨 고민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은 친구의 기대에 발맞춰주고 싶어 나는 내게 무슨 고민이 있나, 잠시 고민을 해봤다. 뱃살? 너무 형이하학적이다. 인간관계? 얘기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 ‘남 욕’ 일뿐. 애들 교육?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바보는 아닐 거야, 알아서 잘 살겠지.’라고 믿는다. 부부 관계? 다행히 최악의 시기는 벗어났다. 뭐, 다시 또 최악의 시기가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딱히 고민이랄 것은 없다. 말하기도 귀찮은 시시콜콜한 문제들이다. 그럼 내게는 진정한 고민이 없는 걸까? 그럴 리가. 고민 하나 없이 이런 얼굴이 되기도 쉽지 않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게도 고민이 있다. 매일같이 생각하고 매시 매분 매초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건 죄다 ‘일’에 관한 것들이다.
그건 아마 내 나이하고도 관계가 있을 거다. 내 나이 서른아홉. 여자로서 한창 일할 나이이며 사회적 욕구가 커지는 40대 초반에 가까워지고 있다. 꼭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앞으로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을 나이에 접어드는 나에게는 지금이 가장 열심히 일할 때다. 지금 씨를 뿌려놓지 않으면 더 늙어서 거둬 먹을 것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뭘 봐도 ‘일’과 관련지어 보게 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회사 지브리와 지브리의 사람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꿈과 광기의 왕국>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딱히 인상적일 게 없을 정도로 일만 하지만) 일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내 책상만큼이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종이를 들추며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일 아침 11시면 정확하게 지브리 스튜디오에 도착해 매일 밤 9시까지 그림을 그린다. 사원들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구령에 맞춰 체조도 한다. 사내 보육원 아이들에게 아침마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그가 일하는 스튜디오 안으로 새 총리 후보의 연설이 흘러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스태프들과 일 이야기를 한다.
매일 마사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쓰레기를 줍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는 3시간이 생활의 기초라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설명한다. 그 안에서 보이는 것들로 세상을 판단하고 또 그것들로 열심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철저한 전쟁 반대론자이면서도 전투기와 조종사를 동경하는 자신의 모순을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는다. 자신이 그리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채 그저 그린다.
지브리가 만든 작품들 대부분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일흔의 나이에도 높은 빌딩의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이 집 지붕에서 저 집 지붕으로 뛰어다니면 어떨지, 전깃줄을 통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이 위에서 보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가늠하는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는 이 천재의 머릿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또, 미야자키 하야오 혼자서는 이 일들을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스태프들이 있다. 그들은 그가 머릿속으로 그린 아름다운 세상과 그 움직임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영화를 둘러싼 모든 해결해주는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도 있고 또 존경하는 라이벌 타카하다 이사오도 있다. 지브리의 의미는 결국 단 한 명의 천재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데 있다. 끝나지 않을 듯 고통스럽고 긴 하루하루를 함께 보낸 수많은 사람이 지브리를 만들어내고 유지해온 것이다.
그런 지브리에서는 리더가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흥을 돋우거나 스태프에게 고함을 치며 서류를 집어던지거나 좌절에 휩싸인 누군가가 책상을 발로 걷어차는 일 같은 건 없다. 록음악도 파티도 리무진도 없다. 그저 아침이면 인사를 나누고 체조를 한 후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다. 가끔 하늘을 그리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 얌전히 하늘을 관찰하기도 한다. 그들은 시골 학교의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묵묵히 일할뿐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성실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작업실 한구석에 놓인 나의 작고 보잘것없는 책상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진정한 재능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언제까지고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전에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는데(나는 실은 뽀로로형 인간에 가깝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일흔의 나이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앉아서 연필을 놓지 않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니 겸손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 거장도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징징대나 부끄러웠다.
“계속 이유 없이 사람들을 소원하게 대하면 나중엔 ‘안녕’이라고 인사할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거예요.”
대니 보일의 영화 <스티브 잡스>는 초반, 이 대사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에 나는 함께 일하던 사람에게 “넌 스티브 잡스가 아니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네 멋대로, 재수 없게 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끔 남편은 일할 때면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남에게 상처를 줄 때도 많은 나를 “능력 없는 스티브 잡스”라 부르기도 하니까.
이 영화는 1984년, 1988년, 그리고 1998년에 있었던 스티브 잡스의 세 번의 프레젠테이션을 그리고 있다. 프레젠테이션의 준비에 앞서 그의 주위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찾아온다. 옛 여자친구인 크리산과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하지만 잡스는 인정하지 않는 딸 리사. 처음 차고에서 함께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한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잡스가 펩시에서 스카우트한 애플의 CEO 존 스컬리. 프로그래머 앤디 허츠펠드. 비서인 조안나 호프만 등등. 그들은 잡스를 비난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그의 마음을 자극한다. 물론 이것은 허구다. 대니 보일은 잡스를 유명하게 만든 세 번의 굵직한 프레젠테이션에 이 인물들을 끼워 넣어 스티브 잡스라는 한 인간 속에 숨은 모순과 혼란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오만함, 사업가나 엔지니어가 아니라 예술가나 지휘자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허세, 모든 것이 자신이 구상하고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독선과 결벽증, 두 번이나 버림받은 아기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약한 자존감, 한때 자신을 내쫓은 존 스컬리에 대한 배신감, 애플Ⅱ팀과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는 워즈니악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는 매정함, 딸과 둘이서 어렵게 살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크리산을 내치는 잔인함, 딸 리사에 대한 불쾌함과 죄책감, 자신이 정말 개새끼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의 총체가 스티브 잡스다.
어쩌면 그는 인간에 대한 피로와 배신감을 컴퓨터에 투사했던 것은 아닐까.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그가 컴퓨터만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제품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을 통해 자신은 좀 더 유능하고 또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인류의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말 근사한 목표일 테니까.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볼 테니까. 드러나는 양상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해결하는 방식도, 일하는 스타일도 다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도, 스티브 잡스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실 두 사람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행복해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영화를 만드는 건 불행한 일일 뿐이라는 70대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담배를 태우면서 어렵다고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나는 일의 본질이란 건 결국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나면 그다음은 꿈의 문제다. 단순히 유명해지고 싶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이 아니다. 창밖을 내다보며 저 멀리까지 날아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음은 인간의 삶은 물론 세상까지 바꾸고자 하는 스티브 잡스의 마음과 같다. 그들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꾼다. 그 꿈을 이루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것에서 무언가가 나온다. 쉬운 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어려운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려 노력하는 과정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전에 만화가 윤태호가 <무한도전>에 나와서 그런 얘기를 했었다. 만화가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만화가가 되는지가 중요하다고. 꿈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꿈꾸던 직업을 다 가졌다. 잡지 에디터가 되어보고 싶었고 작가가 되어보고 싶었고 교사가 되어보고 싶었고 카페 주인이 되어보고 싶었는데, 나는 그 일들을 다 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나는 내가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일들을 했을 뿐이다. ‘과연 나를 진정한 잡지 에디터나 작가나 선생님이나 카페 주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부끄러워서 자라처럼 목이 움츠러들 정도다.
목표로 삼은 봉우리에 오르면 더 높은 봉우리가 보이는 법이다. 문이 열리고 나면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문을 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문이 맞는 문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그 문은 열긴 열어야 하는지, 여기 주저앉아 그냥저냥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일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나 스티브 잡스처럼 대단한 인물이 될 리는 없다. 솔직히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능력도 없지만 내 심장과 위장은 그런 유명세를 견딜 만큼 튼튼하지 못하다. 다만 그들에게서 일 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배웠다. 꿈을 잃지 않고, 우직하게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 행복이나 불행 따위에는 너무 목매지 말고. 아무리 유명해져도, 라이벌이 없을 정도의 거장이나 대가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열심히 일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는 것.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꿈과 광기의 왕국
The Kingdom of Dreams and Madness
마미 스나다ㅣ다큐ㅣ일본ㅣ118분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그를 비롯한 지브리 스튜디오 사람들이 꿈꾸는 상상과 생각을 애니메이션으로 시각화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든 과정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남겨져 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대니 보일ㅣ드라마ㅣ미국ㅣ122분
혁신과 새로운 것으로 무장한 스티브 잡스의 인생. 세상을 뒤바꾸었던 세 번의 무대 뒤에서 그가 겪은 고초와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다. 완벽함 속에 뒤섞여 있는 균열과 고민을 눈여겨볼 수 있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