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도 찾아갔던 그곳

노르웨이 피오르

꿈속에서도 찾아갔던 그곳,
노르웨이 피오르

너무나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짝사랑에 빠진 듯 열병에 시달리곤 한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급기야 그곳을 여행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장소를 한참 동안 여행한 다음에야 잠에서 깨어난다. 가장 먼저 이런 증상을 유발한 곳은 노르웨이가 품고 있는 대자연, 피오르Fjord였다. 오랜 열병을 앓은 뒤 떠난 여행. 기차에 오르며 든 생각은 말 그대로 ‘꿈이야 생시야?’였다.

꿈의 여행을 시작하다

어릴 적 우상과도 같았던 스타를 만나러 가는 듯, 요동치는 가슴을 쓰다듬느라 밤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재계까지 마친 뒤 겅중겅중 뛰어 오슬로Oslo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인 어 넛쉘Norway in a nutshell’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티켓을 손에 넣었다. 우리 돈으로 30만원에 육박하는, 남루한 배낭여행객에겐 사치에 가까운 금액이었지만, 피오르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면 나는 내 간이라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오르의 사전적 의미는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빙하가 없어진 후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좁고 긴 만’이다. 쉽게 말하면 빙하가 만들어낸 대협곡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웅장하고 독특한 풍광은 노르웨이 서부에 집약적으로 몰려있다. 그렇기에 나는 유럽 루트를 구상할 당시,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물가를 자랑한다는 노르웨이를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포함했다. 

대망의 피오르 탐사는 뮈르달Myrdal행 기차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기차 승무원에게 표를 내미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기차는 서서히 플랫폼을 벗어났고 창밖으로 사람의 손이 닿은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창 너머로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대자연이 펼쳐졌다. 기차 안에선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는 큰 키의 나무들이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다가 이내 울창한 숲으로 변해 기차 안을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이때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당연히도, 여행 전 어렵게 구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다.

숲의 향연이 끝날쯤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말간 호수가 펼쳐졌다. 호수 표면엔 하늘이 반사되었는데 아쉽게도 그 빛깔은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었고 곧 작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탄식을 내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의 표정변화를 읽었는지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내게 이어폰을 빼보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피오르는 흐린 날이 훨씬 운치 있고 멋있어요.” 

영국식 악센트를 가진 그의 한 마디에 나의 마음은 다시 꽃구경 가는 ‘봄 처녀’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뮈르달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산다고 했는데 도통 그 마을의 발음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피오르를 보며 자랐다는 그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내 티켓을 확인하며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꼼꼼히 설명해주었다. 나 역시 기대했던 여정으로, 예습을 열심히 한 까닭에 루트를 잘 알고는 있었지만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이 싫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친절한 노신사와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 뮈르달에 도착했다. 

붉은색 건물이 인상적인 뮈르달 역에 도착하자 그는 잠시만 기다리면 플롬Flåm행 열차가 들어올 거라 설명해주곤 “본 보야지Bon Voyage”를 외치며 돌아섰다.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눈으로 좇고 있는 사이 플롬행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다.

날것 그대로의
대자연으로 빨려들다

잠깐이나마 둘러본 뮈르달은 해발 천 미터에 가까운 고산도시였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입자들이 산을 휘감고 있는 고상한 멋이 있는 곳. 나는 쉴 틈도 없이 플롬으로 가는 진녹색 산악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슬로에서 뮈르달을 거쳐 플롬까지 가는 길은 피오르를 보러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만, 그 여정 역시 ‘신이 내린 선물’이라 일컬어지는 노르웨이의 광활한 자연을 즐기기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산등성이 사이를 누비는 플롬행 산악열차는 ‘로맨틱 열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낭만적인 풍경을 선사해주기로 유명했다. 

과연 그 소문은 전혀 빗나감이 없었다. 산등성이를 지날 때마다 까마득한 높이의 폭포들이 포효하듯 물줄기를 토해냈다. 어찌나 높은지, 떨어지는 물줄기 중 절반은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렇게 흘러내린 물은 시내가 되어 협곡 사이를 내달렸고 시냇가 주위로 듬성듬성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커다란 바위와 숲, 폭포가 한 몸으로 섞인 산골짜기엔 작고 예쁜 집들이 위태위태하게 서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조금 전의 풍경을 압도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뿌연 물안개 사이로 산과 호수의 수려한 조합이 드러날 때마다 나는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단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다.

쉬지 않고 멋진 풍경을 실어 나르던 열차는 갑작스러운 굉음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열차 선로 바로 옆으로,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규모가 큰 폭포가 흘러내렸다. 이 장관을 앞두고 10분여간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높이만 90미터가 넘는 ‘쵸스 폭포Kjosfossen’는 열차에서 빠져나온 모두를 주눅이 들게 할 만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쵸스 폭포가 거칠게 내뿜는 엄청난 양의 물은 모두 빙하가 녹은 호수에서부터 온 것이라 했다. 수십, 수백 년 전에 북극을 떠돌던 빙하가 내 눈앞에 다가와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주 전 알프스에서 만난 자연이 아기자기한 매력을 뽐내는 자연이었다면, 노르웨이의 자연은 완전한 날것의 매력을 가진 광활한 대자연이었다.


관객들의 감탄사를 주워담고 다시 출발한 열차는 몇 번 더 소박한 산골 마을의 속살을 보여주고는 마침내 피오르 감상의 시작점인 플롬에 도착했다. 이미 피오르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꽤 붐벼 보였다. 그리고 피오르로 향하는 페리가 정박한 선착장엔 북유럽 신화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괴한 요정, 트롤 인형이 여행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어떤 것도
이곳만큼 경이롭진 못하다

드디어 긴 기다림 끝에 구드방엔Gudvangen행 페리에 몸을 실었다. 플롬에서 구드방엔에 이르는 구간은 노르웨이에서도 최고의 피오르로 꼽히는 송네Sogne 피오르 구간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많은 여행객이 트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착장의 기념품점을 들락거리는 동안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페리에 올라타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했다. 

하지만 이 중요한 순간 안타깝게도 내 손엔 디지털카메라가 없었다. 보름 전 프라하 숙소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카메라는 그 길로 생을 마감했고, 피오르를 찍겠다며 눈물을 머금고 나흘 전에 산 카메라는 거짓말처럼 어제부로 화면에 에러메시지를 띄운 태업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분으로 가져간 필름카메라가 있었다. 하지만 남은 필름은 한 통뿐.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필름을 갈아 끼는 동안 페리는 힘차게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열병을 앓을 정도로, 꿈속에서조차 헤맬 정도로 기대했던 피오르였기에 마음속에 수백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니듯 한껏 들떠있었다.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며 신과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합작품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감히 그럴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송네 피오르는 기대를 저버리는 장면 따위는 안겨 주지 않았다. 페리 난간에 기댄 채 숨죽이고 바라본 피오르의 풍광은 상당히 몽환적이었다.

짙은 물안개가 낀 협곡 사이를 지날 때마다 사방에서 폭포가 흘러내렸고 이따금 등장하는 작은 통나무집의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갈매기와 물새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페리를 뒤따르고 있었고, 저 멀리 바위 위에서 쉬던 물범 몇 마리는 페리를 발견하곤 급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판타지영화의 오프닝 장면 같았다. 하늘 위로 제작자와 감독의 이름이 자막으로 뜬 뒤, 바다 위로 영화의 제목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페리가 방향을 틀 때마다 숨겨져 있던 명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때때론 시꺼먼 먹구름이 하늘을 완벽히 뒤덮어 암흑이 찾아오기도 했다. 궂은 날씨였지만 열차에서 만났던 노신사의 확신처럼 흐린 날의 피오르는 확실히 운치가 있었다. 오히려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의 분위기와 훨씬 잘 어울려 보였다. 페리 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오르를 즐겼다. 손을 꼭 붙잡은 채 커피잔을 부딪치며 감탄하는 노부부도 있었고, 눈앞의 풍경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듯 빠르게 풍경을 스케치하는 청년도 있었다. 

나는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히고 순간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습기가 가득한 공기가 뺨을 스쳤고 숲과 바다의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갑판 위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듯했지만 내겐 잘 들리지 않았다. 풍경 위를 한없이 떠돌고 있음에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함이 느껴졌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주간 유럽 전역에서 만난 화려한 건축물들과 황홀한 조각들을 보며 인간의 능력 또한 자연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빙하가 만들어낸 자연의 놀라운 창조물 앞에서 그 생각은 바람 속으로 단숨에 흩어져 버렸다. 지금껏 접한 그 어떤 인공미도 눈앞에 펼쳐진 노르웨이의 대자연만큼 경이롭진 못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또 열차를 타고 피오르의 시작점 베르겐Bergen까지 이동했다.

하루 더 피오르 속을 유영하고 나서야 나는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잠시나마 머물렀기에 더는 꿈에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종종 피오르를 떠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시간이 지나도 피오르의 잔상은 꽤 오래 나를 괴롭혔다. 한 달 뒤에도, 석 달 뒤에도, 반년 뒤에도 그 풍경이 머릿속에 스칠 때면 나는 그 당시의 나를 몹시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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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글·사진 태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