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부른다면

자고로 책이라면 ‘책다운’ 모양새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두께로 쌓인 종이가 한쪽 면은 콱 묶였고 반대쪽은 장장이 휘날려야 한다고, 모서리가 있는 사각형 종이를 펼치면 글이나 그림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책의 탄생부터 그랬나? 그게 공공연한 약속으로 지켜져 왔나? 절대 그렇지 않다. 이상해서 아름다운 작품을 소개한다. 그 물성을 무어라 부르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책’이다.

C시지G

1. 시리즈 ‘COMPOSE-WAY’
148×210mm

말과 생각의 구조를 조형하듯 다루는 언어 기반의 미술 작업을 선보이는 구슬 작가가 자신의 작업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언어 프로토콜이다. 《META-METAPHOR》(언어를 다루는 방식), 《BØØK–VECTOR》(‘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사유) 등 여섯 개의 포트Port로 구분되어 있다.

2. 《몽수타기행》
210mm×210mm

오래전 익명의 탐험가가 기록한 ‘몽수타夢隨墮’라는 세계의 일지. 그곳에서는 ‘밤’과 같은 물리적 현상부터 장소, 감정, 행위까지도 하나의 존재로 등장하며 전부 몽수타라 불린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그들을 관찰했던 탐험가, 그리고 그 탐험가의 기록을 읽는 우리는 내면의 어떤 모습과 마주하게 될까?

이건 책인가? ‘C시지G’의 ‘한시적 서점TEMPORARY BOOKSHOP’에서 작업물을 넘겨보며 문득 떠오른 질문이다. 책인지 아리송한 그 존재를 이해하려면 먼저 만든 이부터 이해해야 한다. 출판사 이름은 고려시대 토지 분급 제도인 ‘전시과田柴科’에서 움튼 말로. 땔나무를 채취하기 위해 관료에게 지급하던 땅 ‘시지柴地’를 뜻한다. 사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그 땅에서 나는 땔감을 ‘책’으로 이해한다면 그 효용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만든 이에게 책이란 ‘하나의 사건’을 담아낼 그릇이다. 한 권이 탄생하기까지 시각적 작업과 연구, 기획과 선택, 행위가 하나의 사건이 되어 책이라는 결과물보다 앞서 존재한다. 물성보다 안에 담길 내용의 효과적 전달을 우선하기에 모양새와 만듦새는 우리의 예상을 쉽게 뛰어넘는다.

《몽수타기행》은 도판과 텍스트를 종이와 OHP 필름에 각각 인쇄한 후, 링으로 연결해 겹쳐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그림과 텍스트는 하나의 장면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층위에서 존재하여 마치 두 개의 책이 하나로 얽힌 듯한 형상이 된다. 황우주 작가의 상상력이 빛나는 펜화와 구조가 합쳐져 환상적인 세계를 구현한다. 시리즈 ‘COMPOSE-WAY’는 삼각형으로 접힌 하나의 종이를 열면 책이 되는 구조다. 시리즈 속 여섯 권은 만든 이의 작업 세계라는 이야기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단어 사용과 다이어그램 등의 시각적 구성에서 강한 일관성을 띠는 게 특징이다. 다만 지면이 짧고 표현도 압축적이라 모든 읽는 이가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한 사람의 일관된 사고와 오롯한 정의를 엿보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유연한 구조 안에서 독자가 스스로 리듬을 찾아가는 순간이야말로 책이 가진 매력이자, C시지G의 존재 이유일 테니까.

쪽프레스

시리즈 ‘한쪽책’ 《Yield to Partial Elation》
110×165mm

《뉴욕타임스》, 《뉴요커》의 표지를 그려온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러시아 출신 로만 무라도프Roman Muradov 작가의 작품으로, 친구를 사귀려고 한 거짓말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그 거짓말을 누군가는 믿어줄까? 그렇다면 또 다른 친구가 생길까?

‘쪽프레스’의 ‘한쪽책’ 시리즈를 보고 싶다면 먼저 책을 망가뜨려야 한다. 편지봉투를 여는 듯, 상단 가장자리에 그려진 절취선을 제거해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깨끗이 읽어야 한다, 낙서하지 말아라, 새것처럼 다루어야 한다… 그간의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책을 ‘겪어보자’. 근처에 가위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면 손으로 투박하게 그리고 과감히 찢어내면 된다. 주저하게 된다면 “책을 통해 독자가 변하듯, 독자를 통해 책도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만든 이의 말을 떠올려 보자.

봉투 안쪽에 든 아코디언 모양의 접지 한 장에는 한 작품이 담겨 있다. 근대 문학, 그래픽 노블, 만화 등 장르도 다양하며 현재까지 무려 200여 종의 시리즈가 발행되었다고. 제한된 페이지 안에 높은 완성도를 담기 위해 서사보다는 순간의 감각이나 행위가 이끄는 경험을 중시한다. 책이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두툼한 제본, 넘겨 보는 페이지, 연속되는 문장은 한쪽책에선 찾을 수 없다. 대신 섬세하게 관통하는 메시지와 철하지 않은 낱장을 책이라 불러볼 믿음이 쉬이 쥐어진다. 그들이 만든 책은 때로 얇고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과 감각은 결코 가볍지 않다.

Corraini Edizioni

©Corraini Edizioni

시리즈 ‘Un Sedicesimo’ 《No. 40 : Blue Skies》
165×234mm

디자이너이자 스토리텔러인 조 루디 피엘리차티Joe Rudi Pielichaty 작가는 2008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미술대학을 다니던 도중 큰 우울감을 느꼈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하늘 조각을 수집해 16페이지 책에 담았는데, 우리가 올려다본 것과 비슷한 하늘도 있을까?

책이란 글밥이 무수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크고 작은 사진이나 그림이 자리를 지켜야 할까? 단 16페이지짜리인 이 책에는 넘겨도 또 넘겨도 오직 하늘, 아니 하늘이라고 듣기 전까진 전체를 상상할 수 없는 색깔 조각뿐이다. 글쓴이는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신문의 여행 페이지를 찾았다. 밝은 하늘을 발견하면 들쭉날쭉한 모양으로 잘라 스케치북과 사진 앨범에 보존하기 시작했다고. 모로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조각을 발견한 나라를 차례로 적고, 거리상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헤아렸다. 고독했을 그 마음은 우리에게 “모든 회색 구름 뒤에 푸른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직하게 한다. 

제목 앞에 쓰인 ‘넘버’로 알 수 있듯 이 책은 시리즈다. 이탈리아 출판사 ‘꼬라이니 에디치오니Corraini Edizioni’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그래픽 디자인을 만드는” 시리즈를 구상하며 ’16분의 1’이라는 의미의 ‘Un Sedicesimo’라 지었다. (오프셋 인쇄기에 쓰는 종이를 낭비 없이 자르고 접으면 약 가로 17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의 16장짜리 책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정 주제나 편집팀, 레이아웃, 나아가 종이마저도 정해지지 않은 채 그저 아티스트에게 같은 크기의 ’16페이지’를 채워달라고 요청한다. 모든 분야에서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출판사는 사진가, 건축가, 요리사 등 다양한 이들을 만든 이로 여긴다고. 올해 7월까지 무려 78호가 나온 이 시리즈를 보며 과연 누가 책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Neutral Colors

©NEUTRAL COLORS

《NEUTRAL COLORS》
257×188×122mm

출판사 ‘NEUTRAL COLORS’를 운영하는 가토
나오노리Katoh Naonori 편집자가 발행하는 매거진. 다양한
주제 아래, 개개인의 목소리를 담아 전하는 앤솔로지
출판물로 현재 7호까지 나왔다. 편집자와 그래픽
디자이너가 취재 현장에 함께 나가 분위기를 느끼고,
그곳에서의 대화나 풍경을 오롯한 언어로 옮겨 쓴다.

겉보기엔 이 책의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할지 모르지만, 볼수록 ‘보통’과는 다른 지점들을 발견한다. 출판사와 동명의 매거진을 이끄는 가토 나오노리 편집자는 상업적인 요소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곁에서 쉬이 마주칠 개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잡지를 만들었다. 디자인 전반을 담당하며 취재에 항상 동석하는 가노 다이스케Kano Daisuke 디자이너와 제작 방식을 고민하다. ‘오프셋(인쇄판과 고무 롤러를 이용해 종이에 잉크를 전사하는 방식)’에 흔치 않게 ‘리소그래피(매끄러운 석판이나 금속을 활용한 방식)’를 더했다. 무수한 ‘진Zine’이 탄생하고 끝을 맺는 와중에, 수작업이 선사하는 자유로운 만듦새와 풍부한 색감만으로 오래 보고 싶은 한 권이 되었다.

그중에서 6호 《진짜 책 이야기를 하자ほんとの本の話をしよう》가 인상 깊다. 표지, 내지 전면에는 노란색이 적용되었고 서점과 디자인 또는 리소 스튜디오, 출판사에서 모은 스물네 명과의 인터뷰가 담겼는데 왜 책을 만드는지, 왜 파는지 등 위기가 도사리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은 책 만들기에 대한 본심을 물었다. 직설적인 주제어 아래 ‘진짜’ 이야기가 오가는 장장에 귀 기울여 본다.

김미소진

《키링북》
70×30mm 

가톨릭 관련 작품과 미니 아트북, 《똥 탈출기》 등 그림책을 만들어온 ‘김미소진’ 작가의 독립출판작. 오늘 하루, 더도 말고 딱 한 움큼의 응원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한 면에는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 30점, 반대쪽에는 용기와 위로를 불어넣을 문구 30개가 적혀 있다.

채 한 손가락을 넘을까 싶은 《키링북》은 셔츠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책이다. 이름은 작은 걱정을 풀어줄 ‘열쇠Key’가 되길 바라며 30점의 그림과 30개의 문장을 ‘키링 Key-ring’으로 엮은 데서 비롯됐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노래처럼 첫 페이지에는 네잎 클로버를, 다음 장에는 네잎 클로버를 떠올리며 행운을, 그다음에는 행운 같은 무지개를 그리는 식으로 그림을 완성했다고. 응원을 담은 문장은 스스로 해주고 싶던 말이나 상대방에게 들었던 다정함,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대화들로 채웠다. 그림 도구인 오일파스텔의 흔적이 문장 페이지까지 이어져 있어 서로 다른 장면이 하나로 흐르는 듯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 작은 책은 읽는 법도 간단하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한 장씩 넘겨도 좋고, 아무 페이지나 ‘짠!’ 펼쳐 마음에 꽂힌 문장을 발견해도 좋다. 완독이 버겁던 읽는 이도 김미소진 작가의 《키링북》이라면 단숨에 음미하곤 어깨를 으쓱할 수 있다. 만든 이에게 서른 개의 응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가 고른 건 맨 마지막 페이지. 앞에는 “오늘”, 뒷장에는 “답은 무척 간단해요.”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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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사진 박은비 자료 제공 김미소진, 쪽프레스, C시지G, Corraini Edizioni, Neutral Col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