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곳

어떤 날 제주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집이 아닌 공항으로 향하는 친구가 있었다. 밤 비행기로 제주에 내려와서 이틀 밤을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기를 몇 달, 지금은 아예 이곳 제주에 살고 있다. 휴가만 생기면 제주로 향하는 선배도 있다. 혼자 내려와서 차분히 며칠 머물다가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의 일상을 씩씩하게 산다. 그런 그들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싶은 곳들이 있다. 혼자 가면 더 좋을 제주, ‘섬 속의 섬’.

바람 속에 자리 잡은 곳

우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옷을 조금 단단히 입을 필요가 있다. 제주가 원래 바람이 많은 섬이긴 하지만 이곳의 바람은 특히 유난하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해안, 섭지코지. 거친 겨울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섭지코지는 단지 보는 것을 넘어 몸소 체험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뺨을 두드리는 바람 사이를 가로질러 걷다 보면 야트막한 건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제주의 흔한 돌담인 양 자리잡고 있어서 섭지코지를 찾은 관광객들도 어쩌면 “응? 거기에 뭐가 있었어?” 할지도 모를 건물,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명상 공간이다. 사실 섭지코지에는 이미 여러 번 가봤고 이곳 근처 숙소에도 묵어봤지만, 나도 그곳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바람을 피할 겸,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니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나니 매표소 직원이 “들어가서 자유롭게 보시면 돼요.” 한다. 그 말이 참 좋았다. 

자유롭게. 기대는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천천히 걷지 않으면 길을 잃을지도 몰라

담 하나만 넘어들어왔을 뿐인데, 사방이 조용해진다. 북적이던 섭지코지의 소음도 뚝, 그친다. 많던 관광객들도 사라졌다. 제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정원을 걷는 것으로 자유로운 걸음은 시작되었다. 첫걸음부터 아껴 걸었다. 천천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정원을 걸어 물이 흐르는 통로를 지나다 보면 돌담 사이 넓고 긴 창이 보인다. 그리고 그 창 사이로 성산일출봉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던 볼 때마다 새로워 감탄하게 되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장면은 또 달랐다. 분명히 바람이 불고 구름은 흐르고 있는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함을 느끼게 해주는 프레임. 이 건물을 지으며 성산일출봉과 바다와 하늘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와 높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이 몸을 움직였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그다음부터는 점점 깊어지면서 어두워지는 돌담길. 여기부터는 천천히 걷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매표소 직원은 ‘자유롭게 보시라’고 했지만, 사실 이곳에 들어선 순간 건물이 안내하는 대로 내 몸을 맡긴 채 걷게 된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검은 벽이 만드는 선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때마다 달라지는 하늘의 크기에 숨은 자주 가빠지지만, 몸은 여전히 느리게 움직인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걸어 들어갈수록 나와 공간이 서서히 하나가 되는 느낌.

건물 안에 들어가면 미디어 아트로 구성된 공간이 시작되는데, 그곳부터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발로 바닥을 밟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어둠 속에서 빙긋 웃었다. 잘 왔구나. 세 칸의 작은 공간에서는 ‘어제의 하늘’, ‘섭지의 오늘’, ‘Diary’라는 제목으로 각기 다른 미디어 아트를 보여준다.

아까 봤던 가로 프레임을 그대로 가져다가 ‘지금 현재’ 성산일출봉을 보여주는 방도 있고, 하늘을 바닥에 펼쳐놓은 방도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한쪽 벽면이‘빨간 꽃이 떨어지는 나무’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두툼한 방석도 준비되어있었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빨간 꽃이 바닥에 하나씩 흩어지고 쌓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머릿속이 텅 비워졌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은 충만한 고독이 느껴졌다. 동시에 혼자가 아니니 괜찮다고 등을 토닥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점차 고요해졌다. 제주의 돌과 바람과 물을 그대로 가져다가 지어놓은 곳에서 나는 다시 제주를 만났다. 그리고 그 속의 ‘나’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에 혼자 와서 참 좋구나. 다행이구나.

이곳을 짓기 전에 안도 다다오는 제주를 몇 번이나 걸었을까. 얼마나 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이렇게 제주를 통째로 이해한 건물을 지을 수가 있을까. 지니어스 로사이를 돌아나오며 그 마음을 짐작해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도 제주에 단단히 빠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종종 혼자서 이 섬을 찾았을 것이다.

감귤향이 나는 산책

지니어스 로사이를 나와 찾은 곳은 바다 목장. 어느 가을날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그보다 더 파란 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찐한 감귤색 평원이 펼쳐져 있는 사진. 제주의 겨울 동안에만 볼 수 있는 장면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내가 겨울을 기다린 이유 중의 하나다.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00번 동일주 버스 노선에 속해있고, 올레길 3코스의 일부이기도 하다. 도착했을 때는 감귤 껍질을 햇볕에 너는 작업을 막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소를 풀어놓고 키우는 바다목장으로 쓰이고, 겨울에는 이렇게 감귤 껍질을 말린다. 껍질은 보통 사료로 쓰인다고 한다. 새콤한 귤 냄새가 나는 바다 목장을 걸었다. 그리고 동시에 알싸한 겨울을 가로질렀다. 하늘과 바다와 감귤 들판. 한동안 이 장면은 내게 제주의 겨울 이미지로 박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떠올릴 때마다 그 향도 함께 맡을 수 있겠지.

원래 여기서 끝내려고 한겨울 산책은 근처 김영갑 갤러리까지 이어졌다.

바다 목장을 돌아 나와 한참 걸어 올라가면 만나는 이곳 역시 고요한 제주를 담고 있다. ‘지니어스 로사이’와 ‘바다 목장’을 걸은 후 보는 김영갑의 사진은 또 다르게 보인다. 자주 오는 곳이고, 그리고 여러 번 본 사진들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지는 건 그때마다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본 제주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Tip

01 지니어스 로사이 입장료는 2,000원이다. 7, 8월 성수기에만 주중에도 운영하며, 평상시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운영한다. 700번 동일주 버스(동해안 일주도로 노선)를 타고 신양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는데, 정류장에서 섭지코지까지는 거진 한 시간 가까이 걸어가야 한다. 

02 신천 바다 목장은 700번 동일주 버스를 타고, 신풍리 하동 정류소에서 내리면 멀지 않다. 12월부터 2월까지 석 달 동안 감귤 껍질을 말리는 장관을 볼 수 있다. 

03 김영갑 갤러리는 신천 바다목장에서 올레길 3코스로 연결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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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다운

포토그래퍼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