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끝에 남은 여음

김수진 — 풀풀·음악가

종암동으로 향하는 내내 [잎사귀와 나비의 음향]을 들으며 오선지 위에 펼쳐진 한 음악가의 발자취를 상상했다. 아스라한 선율은 꿈에서 스치듯 들었던 멜로디 같기도, 나비의 날갯짓이나 낮잠 든 별이 뒤척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 몽롱한 인상을 어떤 문장으로 옮겨 적을 수 있을까.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한 채 헤매다 마주한 ‘풀풀’은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을 잠시 내려둘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음악가가 고요히 내어준 여백 속에서 쓰는 이와 감상하는 이, 그리고 걷는 이는 마음 놓고 서성인다.

반가워요. 풀풀은 성북구 종암로에 자리하고 있죠. 분위기가 아늑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안녕하세요. 풀풀을 운영하는 음악가 김수진입니다. 종암동에 산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결혼하면서 이사 왔는데, 집 뒤에는 ‘개운산’이라는 바위산이 있어요. 산 가까이에 자리한 덕분에 침수 걱정도 없고, 햇볕도 잘 들어요.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셔서 동네가 무척 조용해요. 저녁 시간이 되면 불 켜진 집도 거의 없을 만큼 고요하고요. 여러모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어요. 

 

자랑할 게 많은 동네네요. 오래전 SNS 게시물로 “하루에 한 번은 꼭 산책을 해야겠다.”고 써둔 걸 봤어요. 그 다짐, 요즘도 잘 지키고 있나요? 

네, 잘 지키고 있어요. 아침마다 강아지 산책을 꼭 하거든요. 이 동네는 아침 6시만 돼도 제법 북적여서, 자연스럽게 일찍 눈이 떠져요. 일과를 시작하면 강아지와 함께 천천히 집을 나서요. 우선 카페로 향하긴 하지만, 곧장 가지 않고 일부러 골목골목을 천천히 거닐어요. 오래된 동네라 골목 풍경 보는 재미가 크거든요. 그렇게 여유롭게 내려가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다시 골목길을 돌아 산을 오르죠. 적당히 걸었다 싶을 때쯤 집으로 돌아오고요. 

 

원래도 그렇게 나선형으로 산책하는 편인가요? 

아니요, 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바뀌었어요. 예전엔 아파트를 나서면 바로 큰 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헤맬 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정류장까지 가는 길도 제법 걸려서, 어느새 그 시간이 산책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원래도 걷는 걸 좋아했지만, 이 동네로 오고 나서 더 즐기게 됐어요. 뭔가… 제가 꿈꾸던 삶에 가까워졌달까요? 사실 전부터 시골에서 사는 게 로망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잖아요. 어딘가 놀러도 가야 하고 가끔은 올리브영도 가고 싶고요(웃음). 그래서 서울 안에서 조용한 곳을 찾고 싶었는데, 종암동이 딱 그런 곳 같아요. 

 

풀풀은 문구와 음악을 만드는 가게죠. 그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공식적으로는 자연을 보며 기록하는 걸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설명하긴 해요. 하지만 사실은 꽤 단순한 이유였어요. 제가 평소에 감탄사를 두 번씩 말하거든요. 예를 들면 “어머, 저거 좋다 좋다!” 혹은 “그거 예쁘다 예쁘다.” 이런 식으로요. 싫은 건 표현을 잘 못하지만, 좋은 건 꼭 강조해서 말하는 편이에요. 제가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길을 걷다가 풀을 보면 “어? 풀, 풀이다!” 하고 반가워하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풀풀’로 짓게 된 거예요. 조금 웃기지만, 어감이 꽤 좋더라고요(웃음).

음악 작업을 하다가 문구점까지 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실용음악을 전공해서 대학 시절부터 졸업한 뒤로도 입시 강사로 꽤 오래 일했어요. 음악에 더 집중해 보기로 마음먹고 일을 그만뒀는데,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시작됐어요. 일을 다 정리한 상태라 생계를 위해 전공과 무관한 알바를 세 개나 뛰었죠. 무리하게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건강에도 이상이 왔고요. 보다 못한 엄마가 당근마켓에서 초등학교 배식 알바를 찾아 직접 학교에 전화까지 해주셨어요. 솔직히 정말 가기 싫었지만,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반년 정도 일했죠. 

 

여러모로 힘들고 고민 많은 시기를 거쳐 왔네요. 

정말 막막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풀풀이 탄생했어요. 제게 음악은 늘 대전제였는데, 배식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음악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봤어요. 그러다 문득 ‘마스킹 테이프나 엽서를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림 그리는 게 원래 취미였거든요. 그전부터 문구도 좋아해서 가볍게 엽서를 제작해 본 적은 있지만, 판매할 생각을 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큰 기대 없이 스마트스토어를 열고 몇 가지 제품을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둘 팔리더라고요. 왜 반응이 오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인스타그램에 열심히 홍보했죠.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느덧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과거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방향으로 흘러온 거네요. 처음 해보는 일이니, 시행착오도 꽤 겪었겠어요. 

몇 달은 샘플을 만들며 난항을 거듭했어요. 그래도 음악가로 활동하며 음반을 직접 제작해 본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죠. 프로듀싱부터 실무까지 직접 하면서 조금씩 노하우가 쌓였나 봐요. 오픈 초창기엔 일이 정말 재미있어서 한 달에 네다섯 개씩 신상품을 내기도 했어요. 음악 작업할 때만큼 무언가를 몰입해서 만들어 본 건 처음이었죠. 미친 듯이 즐겁게 일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많이 회복됐고 체력도 더 좋아졌어요. 음악 작업도 훨씬 잘됐고요. 돌이켜 보면 그땐 어떻게 그런 아웃풋을 낼 수 있었을까 싶은데, 그 원동력은 아마 ‘소통’이었던 것 같아요. 

 

즉각적인 반응 덕분에 힘을 얻은 걸까요? 

그것도 맞지만, 풀풀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정말 사랑스러워요. 주문할 때 배송 메시지에 ‘풀풀을 좋아하는 이유’를 아주 정성스럽게 적어주시거든요. 초반에는 주문이 많지 않다 보니, 엽서에 손편지를 길게 써서 함께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걸 받고 꼭 답장을 써서 보내주시더라고요. 물건을 파는 것보다 그런 소통이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펜팔 같기도 하고요. 사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선지 이런 비대면 소통 방식이 저하고 꽤 잘 맞더라고요. 풀풀 손님들과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죠. 지금도 그런 관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해요. 

 

“음악과 문구를 함께 소개하는 것이 난해할 수도 있겠다.”고 하셨죠. 

문구점에서 음악을 소개한다고 하면 보통은 음악 관련 소품을 파는 걸 떠올리실 텐데요. 하지만 저는 문구는 문구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말하고 싶었어요. 풀풀을 시작하면서 브랜드를 통해 제 음악 작업도 자연스럽게 알리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처음엔 플리마켓에 나가면 손님들이 꼭 “왜 음악과 문구를 함께 소개하세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럴 때마다 ‘아, 드디어 소개할 타이밍이 왔구나!’ 싶어서 최선을 다해 말씀드렸고, 흥미를 느낀 분들이 엽서나 CD를 사 가기도 했죠.

저는 무언가를 기록할 때 꼭 음악을 듣는 편이라, 이 시도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저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꽤 많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일본에 갈 때마다 카페나 옷 가게 한쪽에 CD 몇 장을 진열해 둔 모습을 보면 늘 부러웠거든요. 일상에서 음악을 편안하게 소비한다는 게 좋아 보였어요. 그런 장면들을 떠올리다 문구점에서도 음악을 소개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다만 제가 만드는 음악이 앰비언트 장르다 보니, 풀풀을 찾는 분들께 좀더 친절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마침, 생활 환경이 변하면서 삶도 변한 탓에 자연스럽게 편안한 음악이 나오게 되었어요. 모든 게 이어져서 [잎사귀와 나비의 음향] 앨범이 탄생하게 된 거죠

 

잠시만요, 먼저 ‘앰비언트 사운드’가 무엇인지 짚어봐야 할 것 같아요. 

현대에 이르러 영화나 광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음악이 바로 앰비언트 사운드예요. 간단히 말하면, 분위기를 만드는 음악이죠. 더 나아가 요즘에는 반복적인 구조 안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멜로디로 이루어져 있어 요가나 명상 음악으로도 많이 쓰이고요. 저는 어떤 장면이나 공간에 어울리는 음악이 무엇일지를 직감적으로 잘 캐치하는 편이라, 그런 점에서 이 장르가 저랑 잘 맞더라고요. 평소에도 공간 안에 흐르는 소리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거든요

 

그런 감각에 예민하다 보면, 공간을 고를 때도 기준이 생기지 않나요

맞아요. 요즘은 어디를 가도 음악이 흘러나오잖아요특히 카페에 가면 멋진 스피커로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알고 보면 대부분 가상 악기로 만든 재즈풍 트랙이에요. 요즘 프로그램이 워낙 좋아져서, 버튼 몇 번만 눌러도 자동으로 박자가 만들어지니까요그런데 그런 음악은 오히려 귀를 더 피곤하게 만들기도 해요. 특히 공간 음향 설계 없이 무작정 큰 스피커로만 재생하면, 베이스가 울리거나 파형이 튀어서 오히려 분위기를 해치는 경우도 많고요. 저는 소리를 잘 흡수하는 나무 소재를 쓴 공간을 특히 좋아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저한테는 풀풀이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예요. 이 나무 벽이 큰 역할을 하거든요

 

[잎사귀와 나비의 음향]은 산책하면서 녹음한 자연의 소리로 만든 앨범이죠. 듣다 보면 수진 씨의 걸음을 상상해 보게 되더라고요. 

결혼하고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제 성격이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어요. 집 뒤에 산책로가 있으니 절로 나가게 되더라고요. 햇살 가득한 산길이 저를 부르는 것만 같고, 그렇게 산책하면서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죠. 그 시간을 고스란히 [잎사귀와 나비의 음향]에 담았어요. 앨범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 분위기가 깊어지는데요, 그 곡을 만들면서 과거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같아요한때는 제 삶이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나서 그 시절을 다시 돌아보니까, 전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그 시간을 지나온 덕분에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죠이제는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결국 이 앨범이 수진 씨에게 멋진 전환점이 되어준 셈이네요. 평소 산책할 때는 어떤 장면이나 소리에 귀를 기울이나요? 

친구들이 저보고 ‘엄청난 INFP’라고 할 정도로 예민해서 일이 막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땐 무조건 산책해요. 햇볕을 받으며 혼자 걷다 보면 조금 너그러워지거든요.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면서 계절 따라 피고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가끔 처음 듣는 새소리를 만나면 “어, 쟤는 뭐지?” 하고 녹음 해둬요. 나중에 다시 들으면 이전에 어디선가 마주쳤던 새였다는 걸 소리만으로 알아차리기도 하죠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인상들이 작업의 재료가 되어요

 

자연의 소리를 온전히 담아 내려면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겠어요. 녹음은 주로 어떻게 하나요? 

전용 레코더랑 테이프 녹음기를 들고 나가요. 그 장비로 녹음했을 때만 느껴지는 특유의 감성이 있거든요물론 항상 들고 다니긴 어려우니까 아이폰으로도 자주 녹음해요. 아이폰 녹음 기능이 생각보다 꽤 좋아요음질도 깨끗하고, 파일 전송도 간편해서 작업 효율 면에선 정말 최고죠. 원하는 소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남길 수 있으니까요

 

‘Mountain water’에 삽입된 청량한 물소리가 유달리 기억에 남아요. 이 앨범에 담긴 소리 중 수진 씨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리가 있나요? 

저도 그 트랙을 정말 좋아해요. 그렇지만 이제는 필드 레코딩 소리를 있는 그대로 쓰는 건 피하려고 해요누군가는 새소리도 음악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가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그래서 저만의 색과 관점을 더하려 하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애정을 담은 곡은 ‘A biblical verse’예요. 저희 강아지 발소리가 들어가 있거든요. 그 친구는 유기견 출신이라 짖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목소리보다 더 자주 듣게 되는 소리가 발소리예요. 집에 온 저를 반기거나 밥 먹으러 달려올 때마다 들리는 사뿐한 발걸음, 저는 그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요. 어느 날 산책 중 낙엽 위를 걷는 소리가 유난히 애틋해서 조용히 녹음을 해뒀죠음악에 넣을 땐 강아지 발소리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변형해서 넣었고요. 일종의 이스터에그처럼요

 

돌아가는 길에 집중해서 들어봐야겠어요. 수진 씨 작업에서는 전반적으로 꿈결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던데요. 그것도 의도한 걸까요? 

제가 추상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아요. 저에게 중요한 가치는 ‘사랑’과 ‘연민’인데, 그런 감정은 언어로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잖아요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도 모두 다르고요. 때로는 말투나 눈빛, 손짓처럼 비언어적인 표현이 훨씬 더 진하게 전해질 때도 있어요. 저는 감정을 정의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존중하는 태도가 ‘추상’이라 생각해요. 저 역시 누군가 제 감정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줄 때 큰 감동을 받거든요. 그런 식의 소통이 저에겐 참 중요해요. 그래서 작업에서도 어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저마다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요.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된다고 하잖아요. 수진 씨의 음악 취향도 궁금했어요. 산책할 땐 어떤 곡을 주로 들어요? 

클래식이나 영화 OST요. 대신 볼륨은 아주 작게 틀어요자연의 소리랑 겹쳐 들리도록요. 바람 소리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선율에 겹쳐질 때 마치 원래부터 한 곡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런 조화를 느끼면 아무리 자주 듣는 음악이라도 지루하지 않아요

 

오, 멋진 팁이에요. 그럼 플레이리스트 하나를 반복해서 듣는 편이에요? 

플레이리스트보다는 앨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는 걸 훨씬 더 선호해요. 아, 플레이리스트의 매력을 알게 된 일화가 하나 있긴 해요. 예전에 아는 작곡가 오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운영한다고 해서, 협업 제안을 받고 작업한 적이 있거든요. 한번은 ‘비 오는 날의 산책’이라는 테마로 구성해서 올렸더니 반응이 꽤 괜찮았어요. 당시 작업실이 평창동 근처여서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찍은 국민대 정문 사진을 섬네일로 썼는데, 그 길을 아는 분들이 하굣길이나 산책길의 기억을 댓글에 많이 남겨주시더라고요. 그게 아직 유튜브에 남아 있으려나? (유튜브 앱을 켜서 검색한다.) 어, 찾았어요! 댓글을 쭉 넘겨보면 다들 각자만의 추억에 잠겨 있어요. 어떤 분은 그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공황장애를 이겨냈다고 용기 내어 적어주셨더라고요. 음악을 통해 그런 기억을 나누며 위로할 수 있다는 게 새삼 좋았어요

 

그게 음악의 힘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6월에는 출판사 책사람집과 함께 고다 아야의 《나무》에서 영감을 얻은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나무》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3)에서 주인공이 읽는 장면을 보고 궁금해져서 찾아봤는데, 절판돼서 구할 수 없더라고요.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좋은 타이밍에 출판사에서 선물로 보내주셔서 운명처럼 만나게 됐어요. 한참 윗세대 이야기인데도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여러 번 다시 읽을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죠. 코엑스에서 열린 ‘인벤타리오’ 문구 페어를 준비하면서도 《나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요. 준비 도중 경북 지역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렸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마음’으로 잡아두었던 전시 주제를 ‘나무와 숲’으로 바꾸고 《나무》를 전면에 진열하기로 했어요. 개인 소장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출판사에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연락을 드렸어요. 감사하게도 흔쾌히 응해주셨죠. 책도 더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는 걸 마음만 받겠다고 정중히 인사드렸지만요. 그 인연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행사에 출판사 관계자분들을 초대했는데, 제 음악을 좋게 들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공연 이야기가 오가면서 협업까지 이어지게 된 거예요.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마련된 귀한 자리네요. 《나무》에는 작가가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체험하고 교감한 이야기가 담겨 있죠. 특히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 

작가가 아버지에게 “등꽃이 보고 싶다.”고 졸라 함께 등나무를 보러 가는 장면이 있어요. 부녀가 묵묵히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 장면이 특히 마음에 남았어요.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에게도 등나무와 관련된 개인적인 기억이 있거든요.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그 글을 읽는 순간 불현듯 떠올랐어요. 이후에 작가가 딸을 낳고, 그 아이가 정원수 시장에서 등꽃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는 장면도 나오는데요. 기억이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흐름이 참 애틋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작가의 유년기부터 후대에 남겨진 나무 이야기까지 따라가다 보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게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앞으로의 시간을 그려보기도 했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도 제 개인적인 서사와 책 내용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볼 생각이에요. 책과 함께하는 공연은 처음이고, [잎사귀와 나비의 음향]을 연주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여러모로 더욱 뜻깊게 느껴져요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다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져요.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네요. 산책하다 우연히 풀풀을 마주친 사람에게 어떤 경험을 선물해 주고 싶으세요? 

가끔 여행 중에 ‘어? 여긴 어쩌다 왔지?’ 싶은 곳이 있잖아요. 일부러 찾아온 건 아닌데, 내 취향에 꼭 맞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장소요. ‘편안한 마음’이 풀풀의 슬로건이기도 해요. 이곳이 모두에게 그런 안전지대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풀풀 뒤에 조용히 숨어 있고 싶어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언제든 실망을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작업물에 대해서도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저 가벼이 들렀다가, 뜻밖의 편안함이나 작은 기쁨을 얻어 가신다면 좋겠어요멀리서 찾아오시는 분들에겐 좀더 오래 머물 자리를 내어 드리고 싶어서, 부담스럽지 않은 방법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공간에 일인용 좌석도 마련한 건가요? 

앉아서 잠깐 일기를 쓰거나, 음악을 듣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의자를 놓으면 잘 앉지 않으시더라고요. 다들 저와 성향이 비슷하신가 봐요(웃음). 그냥 산책길에 친구 집 들르듯 가볍게 왔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돌아간 뒤에도 한 번쯤 떠올랐으면 해요. ‘거기 좋았는데, 또 가고 싶다.’ 그런 공간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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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박은비